혹시 소식지에 도움이 될까 해서 올립니다.

관리자
발행일 2003-09-22 조회수 8

‘매미’ 오던 날
마치 폭풍전야라는 말을 실감하기라도 하듯 낮 동안의 날씨는 너무 조용했다.
어쩌면 두려울 정도로 조용했다. 바람도, 구름도, 태양도, 마당 앞 바다도 그리고
그것들을 불안한 듯 바라보는 창가의 눈길들마저 조용했다. 가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염탐하듯 지나가는 까치 한 마리만 그 고요의 느낌을 확인하곤 했다.
그 바람에 길 잃어 잘 못 떨어져 내린 것처럼 아무데 아무렇게나 피어난 하얀 코스모스 작은 꽃잎이 흔들릴 뿐이었다.
조각조각 연결된 허름한 구름 사이에 숨어 비스듬히 비추던 햇살이 조금씩 그 빛을 숨겨가며 저물어 가던 저녁나절, 어느 순간에 어디에선가 갑자기 심술궂은 바람줄기 하나가 온 마당을 한번 휘젓고 가더니 이어 순식간에 폭풍 군단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쉴 틈을 주지 않고 무작정 막무가내로 여기저기 온통 정신없이 휩쓸고 가면서 짙은 어두움을 뿌려대고 있었다. 그 어둠 속에서 급기야 세찬 빗물까지 덩달아 기세등등하게 쏟아져 내렸다. 그렇게 조용한 정적을 깨고 거센 반항의 폭풍우의 반란이 시작 된 것이다.
우린 미처 손 쓸 틈도 없이 심한 경련을 하는 유리창가에서 뭘 어쩌지 못하고 그들의 광기 가득한 몸부림을 바라보고만 있어야했다.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는 혼돈 그 자체였다.
엉망으로 뒤섞여진 소음들과 굉음들이 짙은 어둠 속에서 요란을 떠는 사이에 마당가에 까치밥으로 남겨질 땡감 나무는 열매들 모두 바닥에 내려놓은 채 안간힘을 다해 버텨 주었고 종려나무는 제 몸을 찢어가며 그 혼돈의 고통을 견디고 있었다. 꽃비처럼 분홍 꽃잎 날리며 잎사귀 하나까지 남기지 않은 가벼움으로 목백일홍도 버티고 있었건만 여름 내내 비 틈틈이 햇살 훔쳐 이제 겨우 연둣빛으로 여물어가던 모과 열매를 끝까지 매달고 있던 모과나무는 힘겨움을 어쩌지 못하고 그대로 누워버렸다. 푸르름 끝까지 지키려 애쓰다 넘어져간 소나무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오락가락 하던 전기마저 아예 도망가 버리고 플래시와 촛불 몇 개를 킨 채 요동하는 창문 안에서 마치 퍼포먼스를 구경이라도 하고 있는 듯한 우리에게 심술이 난 빗물은 창틈으로 침범해 들어오기 시작했다. 힘겨루기 내기라도 하는 것처럼 세게 아주 세게 여리게 조금 여리게.. 바쁜 손길로 그들에게 대항해 보건만 그들은 아주 쉽고 간단하게 그들의 영토를 넓혀 방 여기저기에 자리를 잡아버렸다. 이쪽을 방어하면 저쪽으로 저쪽을 막아내면 다시 또 다른 곳을 골라, 아무리 밀치고 몰아내려 애를 써도 비웃기라도 하듯 더 세차게 밀려와 점령해버렸다.
구석구석 그들을 몰아내려는 분주한 작업에 힘겨워할 즈음 느닷없이 시작했던 것처럼 끝도 그렇게 그들의 광기는 느닷없이 멈추어졌다.
뜨거운 한 여름 온 힘을 다해 열정으로 울어대며 짧은 생을 살다 가는 매미처럼 짧은 시간 온 힘을 다해 제 성질을 죄다 부려놓고 태풍 매미는 미련 없이 가버렸다.
어리둥절한 허탈함을 남겨 놓고. 그 허탈함 만큼이나 휑한 상처를 남겨놓고.
매미가 이상현상으로 힘이 세질 수 있었던 건 지구 온난화로 해수면의 온도가 높아 진 탓이라고 하니 결국 매미는 사람들이 자연을 아끼고 보호하지 못한 죄의 에너지에 힘입어 그 대가를 고스란히 되돌려 놓았는지도 모르겠다. 누구랄 것도 없이 떠 맡겨진 이 고통, 특별히 누구를 위해 애통하며 눈물을 흘려야 하는지 가르쳐 주지도 않고 떠난 매미를 야속해 할 수도 없다. 그러나 그것을 깨달을 여유 없이 내가,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본능적으로 알아차려야 했다. 우린 다시 어김없이 우리 앞에 놓여질 새 날을 맞아 일상처럼 서 있어야 하는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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