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진 교수의 고목나무 속 전설 - 가슴 아린 사연을 간직한 회화나무 고목들

관리자
발행일 2012-09-07 조회수 3

































가슴 아린 사연을 간직한 회화나무 고목들2012-08-08



 




회화나무는 둘레 두세 아름을 훌쩍 넘기는 커다란 나무다. 나뭇가지 뻗음이 규칙적이지 않고 제멋대로다. 이를 두고 학자의 기개를 상징한다하여 다른 이름으로 학자수(學者樹)라 부르며, 영어 이름도 스칼라트리(scholar tree)이다. 그래서 널리 알려진 양반 동네에 가면 아름드리 회화나무 몇 그루씩이 꼭 있다. 중국에서는 문 앞에 심어두면 잡귀신의 접근을 막아 그 집안이 내내 평안할 수 있는 상서로운 나무라고 생각했다. 은행나무나 느티나무와 함께 전설이나 유래가 알려진 노거수(老巨樹)를 전국어디에서나 쉽게 볼 수 있다. 고궁이나 서원, 문묘 등 우리의 문화유적에는 어김없이 회화나무가 심겨져 있다. 그러나 회화나무는 심은 사람의 영예만 지켜주는 나무는 아니다. 가슴 아픈 사연을 간직한 회화나무 고목을 찾아가 본다. 




 








동궐도(東闕圖)에서 만나는 사도세자의 회화나무(C), 선인문(B), 창경궁 홍화문(A)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에서 궁궐 담장을 따라 50m쯤 내려오면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선인문이 있다. 문의 안쪽 금천 옆에는 줄기가 휘고 비틀리고 속까지 썩어버린 회화나무 고목 한 그루가 눈에 들어온다. 영욕의 세월을 간직한 궁궐에다 나무의 모양새로도 무언가 사연을 간직할 것만 같다. 사도세자의 죽음을 지켜본 나무라고 한다.




 









선인문 안쪽 금천 옆의 줄기가 휘고 비틀리고 속까지 썩어버린 회화나무 고목







조선 영조 38년(1762) 윤5월 13일 임금은 자신의 손으로 세운 왕세자 사도세자를 8일 동안이나 뒤주 속에 가두어 죽여 버린다. 뜨거운 초여름 햇살에 달구어진 뒤주 속은 사람이 버틸 수 없는 불가마다. 세자가 질러대는 고통의 단말마 비명을 지금의 선인문 회화나무는 고스란히 들었다. 비록 한갓 나무이었지만 자신도 너무 괴로워 보통 나무처럼 올바르게 자라지 못하고 지금처럼 괴상한 모양으로 350년을 버티었다. 사도세자는 회화나무와의 인연이 또 이어진다. 죽기 2년 전인 1760년 피부병 치료를 위하여 지금의 온양관광호텔 자리인 ‘온양행궁(溫陽行宮)’에 잠시 머문다. 활을 쏘는 사대(射臺)에 그늘이 없음을 보고 온양군수를 시켜 품(品)자 모양으로 회화나무 3그루를 심게 했다고 한다. 35년이 지나 심은 나무가 제법 크게 자랐을 1795년, 아버지의 비극을 안타까워한 아들 정조는 손수 ‘영괴대(靈槐臺)’란 비석을 세운다. 다만 옛사람들은 회화나무와 느티나무를 같이 괴(槐)로 표기하여 혼란이 있다. 지금도 살아있는 영괴의 실제는 느티나무다. 




 









홍건적 토벌에 앞장선 김영동이 심었다는 경주 육통리의 천연기념물 318호 회화나무







경주 안강읍 육통리라는 평범한 시골마을에는 슬픈 전설을 간직한 회화나무 한 그루가 자란다. 키 15.5미터, 둘레 네 아름이 조금 넘는 거목이다. 마을 전체를 굽어보고도 남는 거대한 덩치로 지나온 세월의 영욕을 말하고 있다. 이 나무에는 죽음으로 나라를 지킨 한 청년의 이야기가 애잔하게 전해진다. 고려 공민왕 시절, 김영동이란 한 젊은이가 이 마을에서 살고 있었다. 당시 중국대륙에서 홍건적이 침입하여, 1361년에는 임금이 안동까지 쫓겨 내려오는 수모를 당한다. 그 뿐만이 아니다. 남서 해안에는 왜구가 극성을 부려 강화도가 점령을 당하는 형편이었다. 이럴 때 죽어나는 것은 백성들, 학살과 노략질로 온 나라가 들끓었다. 들여오는 소문을 조용히 듣고만 있던 그는 싸움터에 나가기로 결심한다. 마을을 떠나면서 그를 지켜줄 징표를 하나 남기고 싶어 했다. 학자나 귀족들이 즐겨 심은 품격 높은 회화나무가 머리를 스쳐갔다. 그는 자그마한 회화나무 묘목 한 그루를 구해다 심고 살아서 돌아오겠다는 실낱같은 희망을 나무에다 걸어두고 떠났다. 그러나 그의 희망은 영원히 깨어나지 않은 꿈일 뿐이었다. 청년은 전쟁이 끝나도 다시는 마을에서 얼굴을 나타내지 않았다. 이후, 마을 사람들의 손으로 잘 가꾸어진 김영동 회화나무는 600여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우리 앞에서 푸름을 자랑하고 있다.




 









하일주연도(夏日酒宴圖, 이수민 1819년 54x40.5cm 개인소장)에서 본 옛 선비들 집 앞의 회화나무(*)








회화나무는 아까시나무를 닮은 잎사귀 사이로 삼복더위 한여름에 나비 모양의 연노랑 꽃을 피운다. 꽃에는 ‘루틴(rutin)’이란 황색색소가 들어 있어서 옛날에는 종이를 물들이는 천연염색제로 쓰였다. 지금은 모세혈관의 강화작용을 하여 뇌출혈 예방에 효과가 있다하여 고혈압 약을 만드는 원료로 쓰이기도 한다. 우리가 흔히 꿈에서나 만날 수 있는 헛된 부귀영화를 말할 때 쓰는 ‘남가일몽’에 나오는 괴안국(槐安國) 이야기도 회화나무 아래에 있던 개미나라 이야기다. 













삼복더위에 한창 피고 있는 회화나무




 


출처 : 우리숲진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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