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소식지] 이라크 통신 2

관리자
발행일 2003-07-08 조회수 7


이라크지원연대 홈페이지로




   이라크 전쟁중에 미국의 사기를 북돋았던 린치일병의 이야기를 다들 알고 계실 것입니다. 미국의 황색언론이 펼친 거짓말이 이라크 전쟁의 진실을 새삼 일깨워 주는 것 같습니다. 이미 모두가 알고 있는 진실이 아주 조금씩 알려지는 가운데 어려운 상황에서도 이라크 인들은 스스로 일어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현재 이라크에서 생활을 가장 어렵게 하는 것은 ‘전기’입니다. 한낮이면 50도를 훌쩍 넘는 무더운 날씨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물도 제대로 나오지 않습니다. 밤에도 깊이 잠들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컴퓨터를 쓸 수 없어 보고서를 보내기도 어려운 상황입니다.

   얼마 전 후세인 추종자들이 바그다드 지역에 전기를 공급하는 발전소를 공격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뒤로는 사정이 더욱 나빠졌습니다. 그 일이 아니더라도 미군은 전쟁으로 부서진 발전소 시설들을 제대로 되살리지 않고 있었습니다. 현지에서도 텔레비전이나 신문을 보기가 어려워 이라크 또는 바그다드 전반의 사정을 살피지는 못하지만, 우리는 미군이 전기와 물을 공급하는 것을 통해 이라크에 대한 지배를 정당화하거나 사람들의 삶을 조정하고 통제하려는 의도라고 느끼고 있습니다. 현지인들의 의견도 대체로 그렇구요.

  

   아직도 미군은 시내 곳곳에서 탱크와 최신의 무기들로 거리를 점령하듯이 서있습니다. 시위를 하는 군중에서 사격위협을 하기도 합니다. 어린 아이들이 뛰어놀고, 많은 사람들이 활기차게 걷고 있는 모습이 가장 어울릴만한 거리가 군대에 의해서, 탱크와 총에 의해서 아직 어둡기만 합니다. 전후에 100여개의 정당이 난립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정치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전쟁의 여파가 남아있는 가운데 많은 곳에서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또다시 희망을 읽을 수 있기에 이라크는 이라크인의 힘으로 다시 서고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아직 어두운 미군의 그늘을 떨쳐내야하는 힘든 상황이 있지만 말입니다.



   전쟁이 끝난지도 벌써 두달이 되어갑니다. 그 두달동안 평화와 나눔을 위한 연대는 이라크인들과 전쟁의 상처를 함께 아파하고 다시 일어서기 위해서 많은 활동을 했습니다. 유명하고 큰 단체가 아니라 항상 돈은 부족하고 능력도 보잘것없지만, 이라크 민중들과 함께 이라크 민중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서 그들의 친구가 되어 활동한다는 신념은 변함이 없습니다. 지난 소식지를 통해서 평화와 나눔을 위한 연대는 빈민가를 중심으로 이라크 민중들과 함께 활동한다는 계획을 알려드렸었습니다.

   지금까지 평화와 나눔을 위한 연대는 여러 가지 제한된 조건 속에서 가장 쓸모 있는 일을 찾아왔고, 그것이 단지 구호의 차원이 아니라 친구로 다가서며 일을 할 수 있도록 관계를 만들어 왔습니다. 뉴 바그다드의 다섯 개 마을을 다니며 쓰레기 집하장을 짓거나 그곳 유아들을 위해 가루우유를 지급하는 일, 그리고 마을마다 아이들을 위한 놀이 공간을 마련하는 일, 알 타쉬 캠프 난민들에게 이주금을 지원하는 일, 시골 학교 아이들에게 학용품을 지원한 일까지. 평화와 나눔을 위한 연대는 빈민가에서 이라크인들 스스로 일어설 수 있도록 이라크인들과 함께 많은 활동을 벌여내었습니다. 지금도 아이들이 책을 읽고, 안전하게 놀 수 있는 놀이공간을 마련하는 일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어진 쓰레기 집하장을 제대로 활용하는지도 계속 체크하고 있습니다.

  

   활동을 하면 할수록 우리의 힘이 미약함을 느낍니다. 아직도 할 일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 느껴집니다. 하지만 이라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이라크의 민중들이라는 것 또한 느낄 수 있습니다. 그들의 친구가 되고, 함께 아픔을 나누어 그 아픔을 작게 만들 수 있다고 하더라도 결국 그 아픔을 딛고 일어서는 것은 이라크의 민중들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평화와 나눔을 위한 연대는 그러한 역할들을 느끼고 있고, 알고 있습니다. 현재 진행하고 있는 사업들을 잘 마무리하고 이라크 민중들이 그들의 힘으로 일어설 수 있도록 계속 함께 하겠습니다.



   이제 이라크에서의 활동을 정리해야 하는 시기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평화와 나눔을 위한 연대와 함께 현지에서 그리고 한국에서 이라크 민중들과 함께 전쟁의 고통과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의지를 함께 했던 그 나날들을 정리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겠지만, 전세계적으로 그리고 한국에서 최초로 들불처럼 일었던 반전평화의 물결과 이라크 민중들과 고통을 함께 했던 일들을 정리하며 다시 한번 반전평화와 국제연대의 마음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이라크지원연대는 다양한 계획을 가지고 한국의 민중들과 반전평화와 이라크 민중지원의 기억을 간직하고 미래를 밝혀가고자 합니다.
   첫번째로 화보집을 발간하려고 합니다. 전쟁직전부터 전쟁이 끝난 지금까지 이라크 민중들의 삶과 반전의 목소리로 함께 할 수 있었던 우리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과 이야기로 이러크 전쟁을 생생하게 담아내고 기억하려고 합니다.
   두번째로 반전평화팀 활동 백서를 발간하려고 합니다. 화보집과 달리 세세하게 한국이라크반전평화팀과 지원연대 그리고 평화팀과 관련한 언론들의 보도들의 정리를 통해서반전평화팀의 활동을 그대로 담아내고자 합니다.
   세번째로 전후 한국단체 이라크전쟁 구호활동 백서(혹은 보고서)를 발간할 예정입니다. 전후 많은 단체들이 구활동을 목적으로 이라크로 향했습니다. 하지만 많은 단체들의 활동에 때로는 분노하고 때론 안타까워하면서 직접 구호활동에 나설 수밖에 없던 이야기들을, 다시는 비슷한 오류들을 범하지 않기위해서 백서(혹은 보고서)에 담고자 합니다.
   네번째로는 전쟁 보고서를 발간할 예정입니다. 이라크전쟁에 대한 전쟁보고서를 오래전부터 준비했지만 전문성의 부족등으로 아직까지 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라크 사람들과의 인터뷰를 중심으로 전쟁을 기록해서 민족문학작가회의와 공동발간할  예정입니다.
   다섯번째로 전쟁으로 인한 정신건강 실태 보고서를 발간할 예정입니다. 반전평화팀과의 연계로 보건의료단체연합 의료진들은 ‘국경없는 의사회’나 ‘세계 의사회’가 초라할 정도로 의미있는 활동을 했습니다. 이런 활동을 바탕으로 보건의료단체연합과 공동으로 세계의 어느 단체도 하지 못하고 있는 이라크 주요 폭격지역의 이라크 사람들의 정신건강 실태조사를 하고 보고서를 전 세계에 제출할 예정입니다.
   마지막으로 반전평화팀 보고대회 및 평화심포지엄․문화제 ‘2003 이라크, 전쟁과 평화’를 개최할 예정입니다. 8월 7일~8일(가안) 양일간 보고대회와 함께 이후 평화운동에 대한 계획을 함게 모색하고자 합니다.
   위와 같은 다양한 계획을 가지고 반전평화팀, 평화나눔연대, 지원연대의 활동을 정리하고 한국사회에서 큰 획을 그었던 반전평화운동과 지원활동을 기록하고 앞으로 평화운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함께 모색하려고 합니다. ‘2003 이라크, 전쟁과 평화’ 준비위원회에 함께할 자원활동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자원활동가는 당일 행사 준비, 각종 백서 발간준비, 문화제 준비 등에 함께하실 수 있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일지] 이라크민중지원활동 6월21일 (박기범)

아침
   아침이라고, 여덟 시 사십오 분이라고 혜란이가 깨워 일어났다. 눈을 뜨면서도 어제 회의를 하면서 오늘은 아홉 시부터 일정이 시작한다고, 아홉 시에 대문 앞으로 아마르의 차가 올 거라 한 게 기억났다. 아침이 다 되어 잠이 들었으니 눈이 잘 떠지지 않았다. 겨우 일어났다. 일어나 보니 다른 팀원들도 다들 늦어 부랴부랴 아침을 준비하고 있는 것 같았다. 먹는 둥 마는 둥, 어제 저녁에 나온 누룽지를 한 그릇씩 훌훌 덜어 먹고 아침 일을 하러 나섰다. 아마르의 차는 벌써부터 대문 앞에 와 서 있었다.

   (이곳에서 우리가 활동을 하는 데에는 먼 거리를 이동해야 하는 때가 많은데, 우리가 자동차를 이용하는 방법은 필요할 때마다 아마르의 봉고차나 살람의 승용차를 탄다. 참고로 아마르와 살람은 우리 팀의 활동의 현지인 파트너라고 이해하면 된다. 일단 우리가 어느 곳에서 차에 내리면 그 다음 움직이게 될 시간을 미리 일러주고 그 때 와 달라는 식으로 약속을 하는 것이다. 따로 전화를 자유롭게 쓸 수도 없는 형편이니 미리 계획을 잘 짜 놓고 약속한 대로 움직여야 한다.)


알 마시뗄 헬쓰 센터
   우리가 아마르의 차를 타고 간 곳은 우리 팀의 주요 활동 지역인 알 마시뗄의 헬쓰 센터. 이 헬쓰 센터는 원래 이라크 군 기지가 있던 곳으로 전쟁이 지나간 뒤 현지인들과 더불어 헬쓰 센터로 운영하고 있다. 센터 안에는 지금 진료소로 쓰는 건물 뿐 아니라 비어 있는 건물이 더 있는데 그 가운데 한 곳을 지역 어린이들을 위한 공간으로 만들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일을 팀원 가운데 한 사람인 건축가 이상래 형이 구상하여 진행하고 있고, 지금은 우리 팀원들이 건물을 새로 단장하기 위해 페인트칠을 하는 일을 하고 있다.

   헬쓰 센터로 들어가 우리가 일을 할 건물에 들어서니 한 편에서는 시멘트 공구리 작업을 하는 청년이 있고, 한 편에는 빈창에 유리를 끼우는 아저씨가 있었다. 그리고 또 한 편에는 끌을 가지고 다니면서 페인트칠을 할 벽을 다듬는 아저씨. 우리가 오늘 할 일 또한 그 아저씨를 도와 벽을 매만져 놓는 거였다. 아마르와 같이 우리 일을 돕는 아부알리가 사람 수에 맞추어 끌과 장갑을 가져다주었다. 어제 저녁 이 일을 해본 다른 팀원들부터 장갑을 손에 끼고 방으로 들어섰다.


알리, 하이들, 지하드
   끌을 들고 일어난 벽을 다듬거나 못을 뽑는 일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 다음 차례는 반죽처럼 갠 석고를 가지고 벽 사이에 있는 틈이나 흠을 메우는 일이었다. 처음 해 보는 일이라 손이 서툴다. 아마 그 일의 기술자인 듯한 이라크인은 아주 익숙한 손놀림으로 반죽을 개어 끌질을 했다. 우리 팀원들이 한 자리에서 버벅거리며 하고 있는 일을 그이는 아주 날래게 해 나갔다.

   잠깐씩 새로 반죽을 개거나 땀을 식히려고 일을 쉬는 사이, 우리 일을 구경나온 아이 녀석들을 만났다. 처음에야 말이 통하나, 무슨 의사소통이 되나? 그저 몇 마디 알고 있는 말 앗쌀람 알라이꿈 인사를 건네거나 그것도 아니면 눈을 맞추며 그저 우리말로 으응, 안녕? 학교 다녀왔어? 하고 얘기를 건네었다. 그런데 참 이상한 건 그렇게 나는 우리말로 녀석들은 아랍어로 말을 하는데도 무언가 얘기가 되는 것 같다는 것이다. 아이 참, 이 녀석들. 생각해 보면 나 같으면 그렇게 못했을 것 같다. 만약에 내가 어렸을 적 우리 마을에 외국 사람이 와서 제 나라 말로 뭐라 뭐라 얘기하면 내가 우리말로 친근하게 계속 말을 붙이고 그럴 수 있었을까? 아마 신기해하며 구경은 한다 해도 잔뜩 얼어가지고 아무 말도 못했을 텐데. 그런데 오늘 만난 이 아이들은 내가 하는 말이 전혀 들리지도 않을 텐데 아무렇지 않게 대꾸를 하고 말을 이었다. 아니, 이 아이들 뿐 아니라 다른 곳에서 만난 아이들, 길에서 만나는 이라크 인들이 대부분 그랬다.


얘들아, 노래 배워 볼래?
   노래를 흥얼거리며 일을 하다 나와 쉬느라 그랬을까? 아, 내가 아이들 앞에 앉아서 눈웃음으로 억지억지 얘기를 이으며 마주하고 있으니까 혜란이가 얘기를 했다. “오빠, 얘네들. 얘네들한테 노래 음을 가르쳐 주고 얘네한테 불러달래서 녹음하면 되겠다.” 정말! 영어도 곧잘 하는 걸 보니 학교 교육을 받는 아이들 같았다. 아이들은 모두 학교에 다니다 했다. 글을 읽을 줄 안다고 했다. 다른 걸 더 물을 것도 없이 그 자리에서 아이들에게 노래 가락을 들려주었다. 라라, 라라라라, 랄랄라 라라라라라라 (집에 가려는데 내 앞에 아이들이 있다) / 한 소절 음을 불러준 뒤 따라해 보라 했다. 그런데 내가 그 말을 아랍어나 영어로 한 것도 아니고 나오는 대로 “자, 그럼 지금 한 거 따라해 봐.” 하고 말했을 뿐인데 아이들은 신기하게도 내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따라했다. 와아, 대충 비슷하게 따라한다. 잘 따라한다. 그러면 그 다음 소절 라라라라 라알라라 따라라라 라알랄라 (아이들이 날보고 나머지라 할까봐) /를 들려준 뒤 다시 따라해 보라 했다. 얘네들 학교 음악 시간에도 노래를 배울 때 이리 했을까? 선생님이 한 소절을 들려주고 같은 소절을 아이들이 따라하고. 금방 내가 들려준 곳을 아이들이 따라 했다. 잘한다. 와아 잘한다. 나한테 누가 처음 듣는 가락을 가르쳐주면 나는 그렇게 따라하지 못할 것 같은데. 아마 얘들은 한 교실에서도 노래를 잘 부르는 아이들인 모양이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한 번 듣고 그래 잘 따라 부르나.


엄지손가락 씨름
   제대로 된 놀이 이름이 무언지 몰라 엄지손가락 씨주겠라 썼다. 거 왜 서로 한 손씩 내어 반깍지를 끼고 내 엄지손가락으로 상대 엄지손가락을 누르는 놀이 말이다. 그래서 내가 상대 엄지손가락을 누르면 이긴 값으로 상대 손등을 찰싹찰싹 때리는 거고, 진편은 때리지 못하도록 손바닥으로 막기도 하는.

   한참 노래를 부르고 난 뒤…. 아, 아니다. 노래를 같이 부른 건 이 다음이었구나. 석고 반죽 같은 것으로 벽 틈 메우는 일을 하고 나와 아이들 곁에서 쉴 때 내가 이 놀이를 가르쳐 주었다. 그 때는 알리와 하이달 두 아이만 있을 때였는데 알리가 좀 더 붙임성이 많은 아이라면 하이달은 보다 수줍음이 많은. (알리, 하이달 같은 이름은 가는 곳마다 흔히 만나고 있다. 물론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이 알리와 하이달은 예전에 말한 그이들과 다른 처음 만난 아이들이다.)

   이긴 편이 진 편 손등을 때린다는 설명, 그럴 때 진편은 못 때리게 막는다는 설명 그게 좀 어려웠는지 아까만큼은 잘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이 또한 금세 알아들었다. 금세 나와 함께 놀이를 할 정도가 되었다. 옆에서 구경하던 혜란이와 상미, 하운이도 그 애와 내가 금세 놀이를 하게 된 것을 신기해하며 쳐다보았다. 나도 신기했다. 나는 정말 영어 한 마디, 아랍어 한 마디 한 게 없는데 이렇게 놀이를 가르쳐줄 수 있었다니, 그리고 이렇게 금세 같이 하게 되다니. 알리도 좋아하고, 나도 좋아하고. 알리와 몇 차례 더 하다가 다음에는 하이달하고 했다. 하이달은 알리 옆에 앉아 설명하는 것부터 실제로 하는 것까지 다 보고 있었으니 따로 설명해주지 않아도 벌써 다 알고 있었다. 하이달은 좀 수줍어했지만 손깍지를 끼고 놀이를 시작하니 열심히 내 엄지를 피해 제 엄지를 놀렸다. 기분이 참 좋았다. 우리 놀이를 가르쳐 주어 기분이 좋았고, 말이 통하지 않아도 그렇게 놀이를 하며 함께 즐거워한다는 게 참 좋았다.

   아, 그리고 나서 저쪽에서 지하드라는 조금 더 어린 아이가 걸어왔고, 나는 그 애에게도 이 놀이를 함께 하자고 손을 내밀었다. 마치 당연히 알고 있을 거라는 듯이. 내가 손을 내미니 지하드는 악수를 하자는 줄 알고 손을 잡았다. 아, 맞아. 이 이 아이는 아직 이걸 모르지, 하고 속으로 생각하는데 알리가 무어라고 아랍말로 열심히 설명이다. 자기 엄지를 움직여 보이면서, 손바닥으로 손등 때리는 시늉을 보이며, 그리고 또 막는 시늉도 함께 하며. 알리는 벌써 이 놀이를 완벽하게 이해하고는 새로운 아이에게 놀이 방법의 설명까지 하고 있는 거였다.


코끼리 다리 더듬기
   노랫가락을 같이 부른 건 아이들이 빨갛게 부은 손등을 부비면서 그만 한다고 한 뒤였다. 그리고 다시 작업. 벽마다 여기 저기 못자국도 많고 흠집 갈라진 곳은 왜 그리 많은지 잠깐 사이 끝날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새 페인트칠을 하려면 그런 흠이나 틈을 잘 메워야 곱게 칠할 수 있으니 꼼꼼히 해야 했다. 한참 그 일을 하다가 반죽을 새로 개는 사이 잠깐 또 나왔다. 알리와 하이달, 지하드는 그 때까지 앉아 있다. 아이들은 보기만 하면 웃는다, 눈만 마주치면 웃는다. 물론 이 아이들 뿐 아니라 이곳에서 만나는 거의 대부분 아이들이 그렇지만.

   엄지손가락 씨름을 다시 하자 하니 이제 손등 아픈 게 가셨는지 손을 내밀었다. 이번에는 살살 해야지. 놀이를 더 하고 나서 목지영 누나가 사온 음료수를 나누어 마셨다. 좀 넉넉하게 사와서 함께 일하는 아저씨들부터 하나씩 다 돌아갔는데도 몇 개가 남아 아이들에게도 하나씩 돌아갈 수 있었다. 마시라고, 이거 마셔 하고 깡통 음료를 주는데 알리가 안 받는다고 손사래를 친다. 몇 번이나 실랑이를 하다가 겨우 손에 쥐어 주었다. 그 다음 하이달에게도 주는데 역시 안 받는다면서 손을 뒤로 뺀다. 그래도 먹으라고, 괜찮다고 주기는 했는데 그런 면에서는 오늘 만난 이 아이들이 참 이상타 생각되었다. 여지껏 내 기억으로는 내가 만난 이곳의 아이들이 주는 걸 마다하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아무 때나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로 무얼 달라고 손을 내밀고 옷깃을 잡아당긴 일은 예사였지만 말이다. 그래서 처음 한두 차례는 길에서 만난 아이 누구든 무어라도 주고 싶어 다 내주곤 했지만, 그게 오히려 잘못하고 있는 것 같아 그렇게 하지 말아야지, 마치 미군이 조롱하듯 초콜렛이나 껌을 나누어주듯 그러지 말아야지 마음먹고 있었다. 그런데 아까 음료수를 준 일은 그런 게 아니었는데. 모두 땀 흘려 일하다가 목을 축이려 사온 음료수를 나누어 먹는 자리, 그 자리에서 아이들에게 너희도 같이 먹자고 준 것인데 이 아이들은 그렇게까지 사양하는 거였다. 잘 모르겠다. 이 아이들이 보통의 아이들 모습일까? 그간 내가 만난 아이들은 길에서 만난 아이들이었기에, 유독 가난한 마을의 아이들이었기에 그랬을까? 그렇게만은 설명할 수 없을 텐데, 잘 모르겠다. 그렇다. 아무리 내가 이 나라에서 이 사람들과 전쟁을 함께 겪으며 몇 달을 함께 지낸다 하더라도 내가 보고 겪는 것이라야 아주 한 부분, 보잘 것 없다. 나는 함부로 이 나라를 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며 그래서도 안 된다. 기껏해야 코끼리 다리 더듬기.


내 이름은 ‘루아이’
   알리가 제 이름을 ‘알리’라고 얘기해주며 나에게 이름을 물었다. 아, 아이들 이름을 안 건 이 때부터였구나. 나는 내 이름을 ‘박’이라고 얘기해주었고, 아이들에게 나이를 물었다. 알리와 하이달은 열두 살, 지하드는 아홉 살. 그리고 나서 그늘에 앉아 팀원들하고 가벼운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알리가 나에게 내 아랍 이름을 지었다며 일러준다. ‘루아이’. 루아이? 예스, 유어 아라빅 네임 이즈 루아이. 와아아, 나도 이제 아랍식 이름이 생겼다. 루아이, 루아이. 실은 예전에도 팀원 몇이 아랍 이름을 지어 얘기하곤 할 때 그게 살짝 부럽기도 했나 보다. 나도 아랍 이름을 갖게 되니 무언가 대단한 게 생긴 것 같았다. 그것도 아이들이 지어준 이름이니 더 기분이 좋았다. 루아이, 루아이. 다른 팀원들에게 나도 이름이 생겼다며, 이 아이들이 지어주었다며 자랑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자리에 있던 이들 가운데 나만 아랍 이름이 없었지 벌써들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하운이는 ‘알리야 (’알리‘의 여성형, ’알리‘는 이슬람의 존경받는 종교 지도자)’, 상미는 ‘수아드 (행복이라는 뜻)’, 목지영 누나는 ‘자밀레 (아름답다 라는 뜻)’, 혁이 형은 ‘사이드 (행복한 이라는 뜻)’. 혜란이는 전에 카심이 장난스럽게 ‘왈라드 (작은 남자 아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했는데 아까 아이들에게 새로 지어달라고 해 ‘하디르 (작은 강물)’ 라는 새 이름을 얻었다. 아이들이 나에게 지어준 이름 ‘루아이’의 뜻이 무언지는 그 자리에서 제대로 듣지 못했는데, 낮에 카심이 우리 숙소에 찾아왔을 때 물어 들으니 ‘영리한’이라는 뜻이란다. 푸하하. 그 말을 해줄 때 곁에 있던 혁이 형이 ‘라, 라! 라 루아이! 낫 클레버!’ 크게 웃었다. 나도 웃음이 크게 났다.

   아이들은 괜히 내가 지나가면 “루아이, 루아이!”하고 불렀고, 또는 아주 처음 본 사람처럼 내게 이름을 물었다. 그럴 때 내가 마이 네임 이스 루아이 하고 대답하면 굿! 이라며 좋아했다. 저희도 내게 이름을 붙여준 일이 좋은 모양이었다. 물론 더 좋은 건 나였다.


카심
   한 시 쯤 되어 오전 일을 마쳤다. 모두 세 개의 방에 흠을 메웠다. 오후에는 페인트칠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다들 지쳐 배가 고프다며 어서 숙소로 돌아가자고 했다. 더위에 지쳐서도 그렇고, 아침밥을 못 먹다시피 했으니 그랬고, 피곤이 쌓여 그럴 것이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밥을 해 먹었다.

   밥을 먹고 나니 한 시 반쯤. 이곳에서는 보통 점심을 먹은 뒤부터 네 시 사이에는 누구도 일을 하지 않는다. 그거야 물론 뜨거운 날씨 때문. 그래서 평화팀의 일도 오전 아홉 시부터 한 시까지 하고 나면 오후에는 네 시나 되어야 시작한다. (네 시부터 여섯 시까지. 이렇게 써 놓은 걸 보면 일은 않고 놀기만 하는 것 같다. 여기에서 말하는 일 시간은 바깥에 나가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하는 일을 말하는 것이다.) 나는 점심을 먹고 난 시간부터 비는 그 시간에 어제 못다 쓴 글(회의 기록과 팀장에게 들은 그간의 상황)을 마저 쓰려 했다. 오늘 오후 뉴바그다드 지역을 돌아볼 때 ‘국경 없는 통신’이 마련한 피씨방에 잠깐 들르기로 해 놓았으니 메일을 보낼 수 있을 때 최대한 써서 보내야하겠다는 마음이 컸기 때문이다. 그런데 잠이 쏟아진다. 모자란 잠도 자야겠지, 글을 쓰려면 네 시 전까지는 써야겠지, 게다가 그 시간 즈음 하여 카심이 우리 숙소로 온다 했다. 아, 카심! 자는 건 그만 뒤로 미루고 카심이 올 때까지만이라도 쓸 수 있는 만큼 써보아야지. 그런데 컴퓨터를 열고 자리에 앉은 뒤 얼마 되지 않아 카심이 왔다.

   달려나갔다. 아, 카심! 카심이 아직 나를 보지 못한 걸 알고, 뒤로 돌아가 눈을 가리고 그 때 그 장난을 다시 쳤다. 후 앰 아이? 그리고는 카심과 깊이 끌어안았다. 보고 싶었어요, 카심 아저씨.

   반가운 말을 어떻게 더 하지 못하고 여기에 다시 오면 만나서 주려고 뽑아서 가져온 사진을 꺼내었다. 카심 아저씨와 함께 찍은 사진들. 전쟁 전 바끼통에서 만들어준 걸개를 UN 건물 앞에서 걸던 사진, 우리 아이들이 보내어준 그림과 사진을 아들네 초등학교에 가서 교실과 복도에 붙이던 사진, 그리고 전쟁이 일어나 다시 찾아와 그이와 얼싸 안던 사진……. 카심도 그 때 기억이 환히 떠오르는지 그 이야기를 하며 좋아했다. 기쁘다. 사진 속의 카심의 막내아들을 가리키며 그 애가 너무 보고 싶다는 말도 했다.

   실은 이번에 바그다드로 다시 오면서도 가장 찾고 싶은 이가 카심을 비롯해 하이달과 핫산, 세이프 그리고 미셔너리 오브 채리티의 아이들과 수녀님들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못한 것이 카심과 하이달네 주소를 적은 노트를 챙겨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카심이 알고 찾아와 주다니. 카심에게 하이달에게도 전해달라고, 하이달도 꼭 만나고 싶다고 부탁했다. 그랬더니 카심은 자기도 전쟁 뒤로 하이달을 만나지 못했다 한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전쟁이 끝나고 하이달은 몰려든 외신 기자들이 많은 곳에서 돈 많이 주는 그 사람들의 운전기사를 했다는 것이다. 워낙 하이달은 카심이 고용하여 함께 일하는 운전 기사였는데 일이 그렇게 되었다 한다. 카심으로서는 무척 섭섭했을 것이다. 하이달이 어려서 그랬을까? 안타깝다. 전쟁이 끝난 뒤, 사람들의 관계가 아주 각박해지고, 돈을 중심으로 한 관계로 급속하게 바뀌고 있다는 얘기를 듣기는 했지만 실제 내가 가깝게 지냈던 이들마저 그렇게 되었다 하니 더 많이 안타까웠다. 그래도 카심은 보기 드문 신사. 카심은 내가 하이달을 간절히 만나고 싶어 하는 것을 알고 알 카리지 호텔 (우리가 1차, 2차 입국 때 머물던 곳)에 가면 그곳 직원들이 하이달을 자주 만나는 것 같으니 거기에 가서 얘기를 해주겠다고 했다.

   카심은 그 전부터 주로 한국인들에 대한 여행 안내를 많이 해왔는데 이번 반전 평화팀을 보며 한국에 대한 느낌이 아주 달라졌다고, 매우 좋은 기억이라는 얘기를 들려주었다. 특히 전쟁 중에 다시 들어와 카심의 집을 찾고, 몇 가지 약과 음식을 전해준 것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카심의 아내에게 아스피린이 꼭 필요한데 그 때 전한 약 가운데 아스피린이 꽤 많았다.
   그러면서 카심은 한국에서 들어온 ‘굿네이버스’라는 단체를 아느냐며, 거기에서 한 일들에 대해 무척 아쉬움을 이야기했다. 그 단체에서 말하자면 생색용으로 밀가루를 나누어주었는데 그러한 일 같은 것은 하지 않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밀가루야 전쟁 전부터 몇 차례 배급이 있어서 시급히 필요한 것도 아닐뿐더러 지금도 시장에 나가면 한 포대에 2달러면 살 수 있을 정도로 구하는 게 그리 어렵지 않다고 했다. 물론 공짜로 나누어준 밀가루였으니 그거을 받은 현지인 가운데에는 좋아한 이들도 없지 않았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렇지 않아다는 것이다. 괜히 당장 필요하지도 않은 그런 것을, 그것도 제대로 나누어 주는 것이 아니어서 더 받으려는 마음에 사람들 사이에 분란을 일으켜 놓거나 혹은 시장의 밀가루 값에 혼란을 주었다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그 밀가루를 많이 차지하여 내다 팔기도 했다며 말이다. 카심은 우리더러 그런 식의 일은 하지 말라면서 예를 들어 어떤 엔지오는 알 까마리아 지역 같은 곳에 가서 심각하게 쌓여 있는 쓰레기를 청소해주는 일을 했는데, 그것을 보고 현지인들이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껴 해야 할 일을 찾도록 해주었다며 그런 일들을 했으면 좋겠다고 얘기했다. 카심은 그 엔지오가 바로 우리였다는 걸 몰랐던 거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속으로 크게 뿌듯했다.

   카심이 돌아가기 전 한 가지 부탁을 해보기도 했다. 우리가 왜 이러한 준비를 해 왔는지, 어떻게 하고자 하는지 설명한 뒤, 카심의 막내아들이 아랍어로 옮겨온 노랫말로 노래를 가르쳐 줄 수 있는지 말이다. 번역한 가사도 보여주고, 씨디에 담긴 노래도 들려주었다. 노래를 듣고 카심은 노래가 아주 좋다 하면서 거기에 몇 가지 의견을 얘기했다. 하나는 아랍어로 옮기기는 했지만 번역한 것이 사실 노래를 하기에는 잘 맞지 않는 표현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아마 보통 사람들이 잘 쓰지 않는 표준어(?)이어서 그렇다는 말 같았다. 그러면서 이 노래들은 그냥 들어도 노래로서 참 좋으니 억지로 아랍어 가사로 하지 말고 그대로 들려주어도 참 좋겠다며 말이다.


   그뒤 네 시부터 팀원들은 모두 오전에 일하던 알 마시뗄 헬쓰 센터 내 도서관 공사 하는 곳으로갔다. 팀원들은 거기에서 페인트 칠을 했고, 그 시간 어제 들어온 혜란이와 나는 팀장의 안내로 우리가 주로 활동하는 지역을 돌아보았다. 뉴 바그다드의 알 까마리아, 알 마시뗄, 알 라하세, 알 슈하다, 알 우바이티. 둘러보고 나니 왜 그 동안 그렇게 위생이니 환경이니 청소, 쓰레기를 이야기했는지 비로소 알 것 같았다. 말 그대로 마을 전체가 쓰레기장, 어떤 곳은 악취가 코를 찔러 숨을 쉬는 것조차 어려울 정도였다. 그래도 그동안 불도저로 밀고, 포크레인으로 퍼올려서 훨씬 나아진 것이라고 했는데 내가 보기에는 아직도 캄캄했다. 도무지 어디에서부터 손을 대어야 할지, 이 쓰레기들을 어찌해야 할는지……. 그렇게 마을들을 돌며 마을의 모습을 보았고, 우리 팀이 만들어 놓은 쓰레기 집하장들을 보았고, 곳곳에 있는 헬쓰 센터들을 보았다. 그리고 잠깐씩이라도 들러 그곳 사람들에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었다. 예를 들면 알 라하세 같은 경우 마을 전체 사람 수가 12000명 정도 되는데 하루 환자는 150명 정도, 그 가운데 어린이는 70명 쯤. 지금도 가장 많이 찾아오는 사람들은 설사 때문이라 했다. 그럴만도 한 것이 마을 전체가 쓰레기 무덤에 하수구에는 오물이 가득 차 길 위로 넘치고 있고, 어떤 곳은 하수도와 상수도가 뒤엉켜버리기도 했다.

   다섯 개 지역, 열다섯 곳의 쓰레기 집하장과 헬쓰 센터 한 곳을 들르는 데만도 두 시간이 꼬박 걸렸다. 처음 숙소에서 나올 때는 그렇게 둘러본 뒤 ‘국경 없는 통신’의 피씨방에 들러 어제 쓴 글을 보내려 했는데 시간이 없어 그렇게 하지 못했다. 피씨방 또한 여섯 시면 문을 닫기 때문이다. 통신 쓰는 문제를 어떤 식으로든 해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으로 소식을 보내는 것은 중요한 하나의 활동인 동시에 지켜봐 주고, 기금을 마련해주신 분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일 텐데, 그것조차 쉽지 않으니 말이다.

   몸살이 이제는 좀 낫는가 싶더니 더해졌다. 다섯 개 마을을 돌고 나서 페인트 칠 작업을 하는 팀원들과 합류하러 알 마시뗄 헬쓰 센터로 돌아왔다. 팀에 구급약이 많이 있다 하여 챙겼던 약을 빼 놓고 왔더니 그것도 낭패. 할 수 없이 헬쓰 센터에 들어가 진료를 받았다. 진료를 받으면서 ‘아이 참, 이라크 민중지원활동을 한다고 와서 민폐만 끼치는 거 아니야, 이거? 이 약을 내가 먹네’ 하며 웃었다. 이라크인 의사가 청진기를 대고 입속을 살핀 뒤 약을 조제해 주었다.

   다른 팀원들은 얼굴에도 옷에도 온통 하얀 페인트 범벅이다. 열심히, 즐겁게 일하는 모습을 보니 참 좋다.

   저녁 여섯 시, 바그다드에 와 활동하는 천주교 수사님들과 만나 저녁을 먹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수사님 두 분 가운데 한 분이 귀국하기로 하면서 마련된 자리인 듯 싶었다. 알 파나 호텔 쪽에서 약속이라 했는데 나는 가는 길에 숙소에 내렸다. 내려 씻고, 받아온 약을 먹고 잠을 잤다.

   밤 열 시, 회의할 시간에 일어났다. 오늘 회의는 짧게, 간단히 내일 일정을 공유하고 끝냈다. 회의가 끝나니까 바로 불이 나갔다. 회의가 끝나고부터 하루 동안 지낸 오늘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중간에 세 시간 정도는 전기가 나가 있었다. 처음에는 팀에 석유램프가 네 개 정도 있다 했는데 지금은 쓸 수 있는 것이 하나뿐이다. 양초가 필요하다. 충전을 잘 해 놓아야 한다.

   지금은 새벽 여섯 시. 바그다드에도 닭을 치는 집이 많다. 아까부터 여기저기에서 닭들이 꽥끼오 꽥깨댁 한다. 오늘은 이곳 저곳 다니며 사진도 좀 찍었는데 이제 그것들 좀 디스켓으로 옮기고 마쳐야겠다. 다 써 놓고 보니 별 이야기도 없는데 길기만 무지 길다. 정작 오후 네 시부터 다섯 개 마을을 돌며 보고 들은 이야기들 가운데 우리 활동과 관련해 중요한 것들이 참 많은데, 그 뒤부터는 대충 쓰느라 다 빼먹었다. 짧게, 간단히, 핵심만! 내일부터는 좀 일찍 자야겠다. 안녕, 드르렁 쿨……. (2003. 6. 22   06:06)


[일지] 한달, 바뀐 것과 바뀌지 않은 것(6월 28일)  (유은하)

요즘 고민하는 것들
   이 곳에 와서 가장 힘든 점이 있다면, 그것은 ‘혼자만’의 시간을 확보하기가 정말 어렵다는 것입니다. 전쟁 중엔 IPT 분들과 같은 숙소에 있었고, 정수장 텐트에 자다가고, 또 반공호에서 자다가도, 돌아가 누울 개인 방이 있었으니 좀 다행이었는데, 미군이 들어오고, IPT가해체되고 나서는 그 지역이 특수보호지역으로 묶이면서 값이 3배 이상 뛰어서 머물 수 없게 되었답니다.

   바로 그 때 다르 알 하난을 발견하게 되고, 이라크 가정집(옴 아함마드네 집)에 들어가면서 일을 시작하게 되죠. 4월 15일부터 한국에 돌아가기까지의 제 일은 정말 끊임없이 사람을 만나는 일’이었답니다. 다르 알 하난  책상에 앉아있으면 그 곳 직원들, 아이들, 들의 부모, 살람과 함께 일하는 사람들,한국반전평화팀을 비롯한 평화운동가들, 제가 부자인 줄 알고 찾아온 이라크 사업가, 제가 유니세프 등 유엔관련단체에서 일하는 줄 알고 찾아와서 ‘이메일보내달라고 부탁하로 온 사람(통신망이 끊겼으니까요. 제 노트북으로 직법 메일을 보낼 수 있는 줄 안 거죠), 세계 각국의 언론사들(많을 때는 하루에 4-5팀) 또 수많은 NGO까지 만나게 되죠.

   업무시간을 마쳐 집에 돌아오면, 저를 기다리고 있는 건, ‘놀아주길’ 원하는 옴 아함마드네 집 다섯 아이들-아함마드, 세자, 사하라, 도하, 알리-과 그들의 어머니, 살람의 형님, 그의 아내 네지라, 그리고 앞집 헤바와 함사, 또 ‘사진 찍어달라고’ 제 방문을 두드리고들어오는 옆집 아이들까지^^;; 좀처럼 쉴 수가 없는 채로 한 달을 지내다보니 곧바로 몸에 이상이 오더군요. 5월 들어서면서 열대야가 계속되고 전기는 들어오지 않으니 잠을 잘 수가 없었고(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루에 한 시간 들어오던 때도 있고, 며칠은 아예 들어오지도 않았고, 5분 들어왔다가 나갔다가, 잠 자다가 3-4번은 꺱니다. 전기 들어오면 조금 잤다가, 끊기면 더워서 깨고^^*) 물과 음식 때문에 계속 설사를 했고. 업무와 관련된 스트레스 때문에 신경질을 내는 일이 잦아지니까, ‘가야하는구나’ 생각이 들더군요. 그 와중에 한국을 갔으니, 제가 누굴 만날 만한 마음이 들 수 있을까요. ‘좀 심심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연락을 다 끊고 틀어박혀 있을 밖에요.

   그리고 지금 저는 여기 다시 와 있습니다. 오면서, 계속 다짐한 것은 ‘절대 무리하지 않는다’ ‘훈자만의 시간을 반드시 확보한다’ ‘미군을 너무 미워하지 않는다’였답니다. 첫 번째 거야, 처음부터 사역의 목표를 분명하게 해 놓으면 되고, 원래 계획했던 바운더리를 넘어가는 일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선을 긋고 안식하기로 정해놓은 날은 절대적으로 안식하고, 최대한 규칙적으로 생활하려고 노력해야 하는데요. 두 번째 거는 제 스스로 잘 할 수 없더군요. 저번 집에서는 그나마 애들이 커서(10살 이상) 제가 혼자있어하고, 혹은 쉬고 싶어하는 눈치면 그냥 뒀는데, 이 집(살람네)은 워낙 대가족인 까닭에 할머니, 살람네 가족, 형네 가족, 여동생네까지 몽땅 모여있어서 가만히 좀 있을라치면 제가 뭐하나, 계속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미안해, 놀아주고 싶은데, 혼자 책 좀 읽어도 되겠니?”하면 그게 ‘가 달라’는 이야기인 줄 감을 못 잡고 옆에 계속 앉아있는 거죠. ‘지금 이 순간’ 까지도 말입니다^^ 혹은 아래층 마당에서 ‘으나, 으나’하며 불러대지요. 이라크 가종에서 지내는 건, 한국 사람들끼리 있는 것보다 배우는 점이 많아서 참 좋은데, 아침마다 2살배기 자헤라의 빽빽 울음소리에 잠을 깨고, 생각할 시간이 없다는 건 힘든 일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생각하는 것은 , 아주 실제적인 훈련이 되는 것 같습니다. 세 번째는, 미군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까 하는 고민과 연결됩니다. 일단, 미영 연합군이 이리로 밀고 들어왔고, 지역의회를 마을마다 만드는 등 영항력을 확대하는 시점에서, 지난 5월의 무정부 상태와는 또 다른 상황에 처했습니다. 그건 뭔가 하면 미군이 잡고 있는(혹은 배후조종하는) 정부와 어떻게든 접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이야기니까요. 오늘 오전 노동부 장관을 찾아갔지만, 장관이라고 해봐야 결정권한이 없고, 미국 쪽에서 ‘이런 복지분야에 관심있는 NGO 다 모여보슈’하고 미팅 자리 만들어주고, 그걸 전반적으로 통제하러 들테니까요. 이것은 어찌되었든, 관계를 제대로 풀어나가는, 어느 정도의 정치력이 요구되는 일이란 생각이 듭니다. 아시겠지만, 제 안에 미국에 대한 좋은 생각이 있을 리 없었고, 더더군다나 전후 미군이 벌이고 있는 행태를 계속 보면서, 일말의 희망 같은 걸 버린 상태에서, 제가 그들과 얼굴을 마주 대하면서 ‘사이좋게’ 일할 수 있을 거라곤 기대하지 않습니다. 얼굴 안 보려고 한국에 돌아간 거잖아요.(물론 한국에서도 안 볼 수는 없었지만ㅠ.ㅠ)


닫힌 문 앞에서
   다만, 저의 고민은 제가 마음이 쓰이는 장애 고아원 사역은 어떻게 하냐는 거죠. 지난 4,5월은 정부 신경 안 쓰고 하고 싶은 만큼 일을 했는데, 그리고, 이제야 정작 문제가 뭔지, 어느 부분을 도와야 하는지 파악해 간다 싶었는데, 그걸 하기 위해서는 제가 같이 하기 싫은 이들을 마주해야 하는 일이 생긴 거죠. 다르 알 하난에서도 마찬가지였죠.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찾아갔는데, 혼자서는 불가능했고, 아이들을 돕기 위해서는 직원들을 먼저 일터에 복귀시켜야 했고, 매니저와의 관계를 풀어야 했고,이런 식으로 어느샌가 보니, 제가 잘 하지도 못하고 좋아하지도 않은 행정을 하고 있는 제 자신을 발견하고 놀랐었죠.

   지금도 마찬가지랍니다. 그때 만났던 아이들, 특히 제 딸 말라키가 보고 싶어서 왔는데, 걔들을 만나려면 노동부 장관 허락을 받으라고 하고, 다르 알 하난 건물은 ‘분홍색 예쁜 집’ 이 되어 있고, 담장은 아예 ‘들여다보지도 못하도록’ 만들어 놓고-‘무슨 감옥이야?’ 싶게 말이죠- 제가 무작정 찾아가서 문을 두드린다 해도, 직원과 아이들은 저를 반길지 모르겠지만, 어떤 외부인도 반기지 않는(특히 아랍권 사람도 아니고, 부자도 아니어서 돈을 찔러줄 일도 없는) 매니저가 저를 어떻게 볼까 싶습니다.

   이러저러함에도 불구하고, 저는 그린카든지, 허가증인지를 앞세워(I got a permission today!!) ‘밀고 들어가’는 게 잘 하는 건가 싶습니다. 매니저든 간호사든 혹은 건물에 돈을 ‘처바른’- 방마다 에어컨을 달아주고, 애들 침대를 싹 바꿔주고, 매니저 방에 위성전화까지 달아준@,@ 아랍 에미레이트대통령일지라도 정작 아이들에게는 관심이 없는데, 그 내부적인 개혁을 제가 ‘무슨 권리’로 요구하거나 혹은 이끌어낼 수 있겠습니까. ‘어쩔 수 없지. 이쯤해서 돌아서야 해’ 하고 다른 일을 찾아보아야 하는 건가요. 아님 ‘닫힌 문을 열고’ 한번 더 들어가봐야 하는 건가요. 저 대신 고민해서 조안 좀 해주실 수 있나요?

   이런 고민은 자원봉사팀을 위한 숙소 마련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도착해서 한 달 동안은 ‘호텔’ 외의 다른 곳엔 있을 수 없었답니다. 외국인으로서는 이라크 가정을 방문하는 것도, 집을 빌리거나 사는 것도 금지되어 있었으니까요. 오로지 대사관 관계자들과 사업가들 뿐이었죠. 지금은, 외국인들이 점차 집을 사거나 빌리고 있습니다(이와 관계된 심각한 이야기는 나중에 자세히 하지요)

   저와 한국반전평화팀, KAC 모두, 한국인들이 자신의 사역을 마치고 나간다 하더라도, 이라크의 필요를 가장 잘 아는 현지인들에 의해서 이 사역이 더 효과적으로 지속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지금껏 모아진 재정-사역하고 남은 돈, 조금씩 들어오는 후원금-을 한 창구로 모아 이라크 현지인이 만들 NGO에 지원하면 이상적일 것이라고요. 물론 이라크엔 NGO라는 개념도, 더더군다나 ‘평화’와 ‘복지’를 위한단체는 더더욱 없었죠. 그 와중에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계속 일할 단체를 만든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겠죠. 그래도 감사한 일은 4월 중순부터 저와 일했던 살람이, 제가 한국에 온 다음에도 반전평화팀과 계속 도역했고, 지금은 상황이 바뀌어서, 그가 필요를 먼저 찾아내고, 저희가 그에 필요한 재정과 자원들을 제공하고 있죠. 지금에 있어서는, 이전에 그가 했던 타이어 무역상을 관두고, 이런 일을 계속 해나가고 싶어 하는 마음을 내비친다는 것입니다(We can help him).

   자원봉사팀이 7월과 8월에 온다 할 때 그 숙소는, 곧 만들어질 이라크 내 NGO(현재 100개가 넘는 신생 정당이 생기고 있는데, NGO로서는 최초가 아닐지?)가 쓸 수 있는 사무실로도 활용할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합니다. 그런 차원에서도 저는 AlNur 시각장애인 학교의 창고-방이 9개 있는-를 게스트하우스 겸 사무실로 개조하는 방법을 제안했고, 살람은 제게 주택을 렌트하는 것을 제안했습니다. 어차피 창고를 개조하는 데 드는 돈이나, 빈 집에 필요한 가구를 들여놓는 돈이나 비슷할거라구요. 물론 알 누르 스쿨은 큰 길에 있으므로, 새로 만들어질 NGO가 사역하는 데 어떤 면에선 더 유리한 점이 있죠. 접근성이 용이하고, 어느 정도의 자동적 홍보도 되고, 그런데, 살람의 의견은, “다 좋은데, 만일 그 창고를 다 개조했다고 쳐 보자. 사람들이 와 ‘너희가 뭔데, 국가소유 건물을 사용하냐고 하면 뭐라고 할거야? 지금이야 지역 담당 미군 장교 Ramzi가 우리가 하는 일에 호의를 보이고, 매니저 바틀도 마찬가지여서 얼마든지 사용을 허락했지만, 미국의 태도가 언제 바뀔지 모르고, 게다가 장교가 바뀌기라도하면 또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지금 많은 신생 정당들이 공공건물(국가소유의)을 맘대로 쓰고 있는데, 그거 문제가 될 소지가 많아. 하지만 집에서 일하는 건 누가 뭐라고 하겠어?”

   실은 제 성격 같아선, 쫓겨날 때 쫓겨나더라도, 그 동안 만큼은 밀고 나가고 싶은데, 살람은 좀더 안전하게 가자는거죠. 즉리고, 자신은 지금 미군과 대면하거나, 문제를 만들기는 정말 싫다는 거죠. 저는 그 이야기가 많다는 생각이 들어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어제 비교적 싼 가격에(한 달에 320-350불) 빌릴 수 있는 3층 집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전에 머물던 옴 아함마드네 집 옆의 옆 골목인데요. 1층에 식당과 홀 2개 화장실 2개,2층에 방 4개 화장실 2개, 3층에 방 2개 화장실 하나, 지하에 반공호 겸 창고 하나가 있는 집이에요. 건물이 깔끔하긴 한데, 가구는 거의 없고요. 한달에 30만 디나르(1달러가 요즘 1400-1500디나르 정도 하니까 앞의 가격이 나오죠) 정도에 빌릴 수 있습니다. 이모저모 생각해봐도, 호텔에 있는 것보다는 집에 있는 게 앞으로 올 팀을 위해서는 좋은 것 같고요. 어차피 저로서는 창고개조에 들어가는 노력이나, 집을 리모델링 하는 거나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이 부분은 조금 더 생각해서 제게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하여간, 어딘가를 ‘살만한 곳’으로 만드는 건 참 ‘즐거운’ 일입니다. 청소하고, 꾸미고, 음식하는 건, 재밌잖아요^^*

   아, 글이 길어지지만, 마지막 한 마디. 집 문제로 계속 고민하면서 어젯 밤 말씀을 읽고 기도하는데, 제 안에 드는 깨달음은 “권리를 포기하고 대가를 지불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뭐냐 하면, 제가, 아니 후원자들이 보내주신 재정으로 알 누르와 다르 알 하난에 뭐가 도움을 주었다고 해서 ‘그 대가로’ 어떤 특혜를 받을 생각을 하지 말라. 무언가를 요구하지 말고 그냥 주라. 그리고 ‘돈이 들더라도’ 대가를 지불하면서 일하라는 거죠. 흠..제게는 꽤 놀라운 깨달음이었는데, 마침 산상수훈을 읽게되고, 그에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할 것이라’는 말씀이 다시 눈에 들어오더군요. 물론 여기서도 ‘돈 많은 자가 땅을 차지하고’ 있지만, 그 방법을 버리라는 거죠. 그냥 지금은 계속 돈을 쓰면서 일을 하고, 믿음으로 기다리면, 언젠가 때가 되어 좋은 건물과 땅을 주시리라..뭐 그런 믿음이 듭니다^^ 또 소식 전할게요., 기도와 조언 기다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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