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을 기리며 - “나는 집착하지 않으니 해탈할 일도 없을 거요.”

관리자
발행일 2005-02-16 조회수 16

<고인을 기리며>

▲ 이윤기 소설가·번역가

1991년 6월 6일 오후 1시, 나는 미국 미시간 주립대학교 국제대학의 한국인 학장을 만나게 되어 있었다.
서울대에서 학사, 미국 명문 하버드대에서 석사, 역시 명문인 프린스턴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인물이라고 했다.
한국 여권을 지닌 최초의 미국 주립대학교 학장이라고 했다.
호텔 밖은 몹시 더웠다.
하지만 나는 준비해간 양복, 그것도 두꺼운 춘추복으로 정장하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학장 댁으로 갔다.
반바지 차림의 한국 학생 서넛이 뜰에서 고기를 굽고 있었다. 나이가 좀 든 학생도 있었다. 그 학생의 반바지 길이는 거의 수영복 수준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용무를 말하고는, 쏟아지는 땀을 닦으면서 뜰을 지나 거실로 들어섰다.
학장 비슷한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소파에 앉아서 기다렸다.
서재 문이 열리면서, 나비 넥타이로 정장한, 점잖은 학자가 금방이라도 나올 것 같았다.
그가 영어로 말을 걸 것인지, 한국어로 말을 걸 것인지 그것도 견딜 수 없이 궁금했다.
영어로 말을 걸면 나는 망한다, 제발 한국어로 말을 걸어주었으면…. 거의 기도하는 심정이었다.
그런데 밖에서 고기를 굽던, 반바지 차림의, 예의 그 나이 든 학생이 거실로 들어섰다.
그는 악수를 청하고는 손을 내미는 나를 끌어 덥석 껴안더니 조금도 미국화하지 않은 한국어로 말했다.
“가벼운 차림으로 오실 줄 알았는데, 내가 틀렸네요. 양아치 임길진입니다.”
그 자칭 양아치가 바로 한국인 학장 임길진 박사였다. 당시 내 나이 45세, 그의 나이 46세였다.
소탈하다기보다는 탈속한 듯한 그 모습에 완전히 압도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해 여름부터 5년 동안 나는 배우고 또 익히면서, 완전히 세계화한 이 한국인, 완전히 한국화한 이 세계인 스승의 곁을 맴돌았다.
미국 부통령과 너나들이를 하고, 주지사의 어깨를 중심이 무너지게 칠 수 있을 만큼 미국인들과 가까웠어도, 그는 끝내 한국인이었다. 그는 미국 대학의 행정가일 때는 증오처럼 강경했고, 조선 선비일 때는 오래된 술처럼 순후했다.
그는 도시계획학 학자이기도 했고 한국어로 시집을 낸 시인이기도 했다. 그는 시를 쓰되 한글로는 물론이고, 한문으로도 쓰고, 영어로도 썼다. 그는 문인화를 습작하는 아마추어 화가이자, 판소리를 애호하는 귀명창이자, 태권도 고단자이기도 한 토종 한국인이었다.
미국의 한국인들에게 하던 그의 공격적인 제안이 귀에 쟁쟁하다.
“…유학생들이나 연구원들로부터, 아들딸에게 영어만 가르쳐야 하느냐, 한국어도 가르쳐야 하느냐는 질문을 자주 받지요. 다 가르치세요. 왜 한 가지만 가르쳐요? 힘이 남으면 일본어와 중국어도 가르치세요. 프랑스어도 가르치고 독일어도 가르치세요. 미국 와서까지 김치와 고추장 타령 하려거든 다 틀렸으니까 한국으로 돌아가세요. 김치 타령도 하고, 햄버거 타령도 하세요. 그리고 이곳은 미국이니까 무엇보다도 영어로 말하세요. 컴퓨터를 배우세요. 영어와 컴퓨터 모르고는 반미도 안 됩니다. 배우세요, 안 되면 죽어버리세요….”
독신이었던 그는 술과 담배도 즐기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즐기는 것은 조금도 방해하지 않았다. 담배도 더러는 내 것을 빼앗아 피웠다. 중독되면 어쩌게요 하고 내가 걱정했을 때, 그가 한 말이 잊혀지지 않는다.
“나는 집착하지 않으니 해탈할 일도 없을 거요.”
새 세기 들어서는 환경운동연합의 공동대표가 되어, 조국의 환경운동까지 훈수하던 그의 부음(訃音)을 그제 들었다. 우리가 즐겨 다니던 음식점 앞에서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했다. 아, 학장님, 학장님, 우리 학장님.


Comment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