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전통문화 모두가 옳은 것인가

관리자
발행일 2002-12-30 조회수 6

평범학생님에게
평범학생님 안녕하십니까?
님께서 예전에 우리나라의 제사풍습에 관하여 님의 부친과 토론한 내용을 본 게시판에서 접하고 본인의 생각도 한번 게시하겠다고 약속한 적이 있습니다. 본인의 게으름으로 여러 날을 차일피일하여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약속의 부채를 짊어지고 살기란 약간의 부담도 있었음을 시인하면서 본인의 생각을 전하고, 부채의 적재량을 줄여서 가벼운 마음으로 살아보고 싶습니다.
글을 접한 지가 오래되어서인지 기억이 확실하지가 안습니다만 주로 제사에 관한 내용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저는 오늘 죽음의 마지막을 보내는 모든 이들의 과정과 장묘문화, 제사문화와 성묘에 관하여 표현해보고 싶습니다.
저의 부친께서는 1997년에 77세를 일기로 작고하셨습니다. 치료가 불가능한 치매를 앓고 있던 중, 길을 가다가 쓰러져 고관절이 부러지는 불상사를 당하여 여수 s병원에서 수술을 하였습니다. 인조고관절로 대체하였으나 밤만 되면 반복되는 치매증상으로 수술부위를 보호할 수가 없어서 주치의와 상의하였더니 바륨이라는 약을 주사하여 움직이지 못하도록 하겠다고 해서, 그 당시 바륨이라는 의약품이 많이 투여하면 사람이 죽을 수도 있는 극약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고, 의사도 알려주지 않았으며, 당시에 절박한 상황 때문에 동의하여 주사하였습니다. 그 결과 연로하신 아버지의 인체면역력이 버티지를 못하고, 산과 염기의 밸런스에 문제가 발생하여 생명체가 살아갈 수 있는 혈액의 수소이온농도(PH7.25-7.45)가 PH4까지 악 산성으로 떨어져서 죽음직전까지 가게되자 급하게 생리식염으로 염기의 밸런스를 맞추어서 위기는 극복하였으나 위기에서 벗어났을 뿐, 생명력을 근본적으로 회복하기에는 이미 불가능의 늪에 빠져있다는 사실을 느끼게되었고, 문제는 그때부터  수반하는 합병증으로 부친의 고통이 심하였고, 반복되는 검사와 확인되지 않는 병으로 인하여 유추치료를 할 수밖에 없어 중복되는 약물투여로 부친의 육체가 초죽음이 되는 모습을 보고 안타까웠습니다. 그리고 의사들이 남발하는 처방으로 필요이상의 혈액이나 혈소판, 알부민 등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약물의 투여가 과연 필요한가하는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치의에게 "부친의 병을 완치할 수 있는가"라고 물었습니다. 의사의 대답은 부정적이었고 자신할 수가 없다고 하기에, 그렇다면 의료사고의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부친의 연세를 감안하여 문제는 제기하고 싶지 않으니 이후의 치료행위는 항생제 등 약물치료는 금하고 대사활동에 필요한 포도당, 아미노산, 비타민 등만을 투여해달라고 요구하자 일언지하에 퇴원을 요구하였습니다. 의사의 명령을 거부할 수가 없어서 퇴원을 하였습니다. 의사가 요구하는 데로 치료하지 않는 환자는 그들의 연구와 경험축적에 도움이 되지 않으며 무엇보다도 수가가 저렴한 환자는 그들의 행복추구에 장애물로밖에 여기지 않는구나 생각하니 씁쓸하였지만 불가항력이었습니다. 퇴원하신 아버지는 고통을 느끼지 않고 6개월을 연명하시다가 자연사하셨습니다.
요즈음 사람은 요람에서 무덤에 가기 직전까지는 병원에 의존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여기고 있고, 죽어 가는 순간도 최후에 산소까지 동원하여 1초라도 연명시키려고 하는 과정에서 자연사의 의미가 없어졌고, 명을 다하였어도 거역하고 싶어하는 가족구성원이나 의사들의 욕구가 어차피 운명을 달리할 사자에게 필요이상으로 자원을 낭비하고 있으며, 이런 행위가 후손들의 많은 시간을 낭비하고 국가적으로는 의료보험재정의 악화를 가져오게 만드는 원인이기도 하며, 마땅히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할 자원을 쓸데없이 낭비하여 순환하여야 할 자연환경의 파괴도 심각하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장례의 역사에 관해서는 확실히 알고 있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내가 경험했던 바로는 우리 선조 들이 상부상조의 정신으로 서로를 돕자는 취지의 풍속이었고, 과거시대의 문화가 묘지만을 고집해왔기 때문에 요즘처럼 기계문명이 발달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상주 혼자서 치르기란 불가항력이었기 때문에 서로 도울 수밖에 없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러나 매장이 다양한 방법으로 진행되고 있는 지금은 획기적인 변화가 요구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도 누구들처럼 부친의 장례를 병원에서 치르기로 하였고, 부고하여 3일장을 치르는 동안 모든 장례비품이 그때 한번 사용하는 일회성 소모품이었고, 비싸다고 하면, 마지막 가시는 길인데 하면 뚝해야하고, 아버지가 보지도 못할 화환과 조문이 현실적으로 무슨 필요가 있을까하면서 번민하였습니다. 그리고 1년 간 가매장을 해서 다시 묘지에 안장하는 과정은 매우 불요불급한 과거의 관습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저의 사후는 화장을 원칙으로 하고 만약 후손들이 산야에 뿌리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납골당을 정하여 보관하다가 나의 2세가 죽게되면 내가 있던 곳에 안치되고 3세가 나의 유골을 산야에 뿌려줄 수 있도록 해야겠다는 결정을 나름대로 하고있습니다.  
저는 유년시절을 고향인 돌산에서 보냈고, 제가 성장하던 60년대의 제사는 잔치여서 손꼽아 기다린 적도 있었고, 끝나지도 않은 제사음식을 훔쳐먹다가 조부님에게 꾸중을 듣던 경험이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스쳐지나갑니다. 현대인들의 입맛에 맞지가 않고, 만드는 과정도 복잡한 음식을 여성에게 가혹한 노동을 요구하면서 장만하기보다는 제사상을 생략하고 고인의 영정 앞에 들꽃이라도 한 송이 바치고 현대인들의 입맛에 맞는 음식을 장만하여 형제, 가족 간의 소식을 묻고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하는 시간을 가지면서 추모했으면 싶고, 제주 또한 장자의 원칙이 아니라 고인의 2세가 교대하여 준비하게 된다면 형평성에도 맞고, 자칫 벌어질 수도 있는 가족구성원간의 다툼도 없어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우리의 대 명절인 추석은 1년 중 인구의 이동이 많은 날이고, 성묘를 하는 날입니다. 과거의 농경사회에서 햇곡식과 과일 등을 준비하여 조상에게 제를 지내는 다분히 토속적인 신앙이 아니었을까요? 그러던 것이 관습적으로 풍속화 되어 지금에는 사회적으로 큰 행사가 되어버리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저도 청년시절을 서울에서 생활했습니다. 우리들이 청소년기를 보내던 시기에 많은 이들이 고향을 떠나 객지에 생활하면서 부모 형제를 만날 수 있는 시간이  그리 많지가 않았기 때문에 손꼽아 기다리던 이유도 한목 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성묘를 할 때마다 느끼곤 했습니다. 음식도 음식이지만 묘지마다 먹지도 않고 버려지는 잔술을 아끼면 "우리 형제들인 걸식아동의 배고픔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라고 말입니다.
지금까지 나열한 모든 사실이 한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사후에 벌어지는 복잡하고 소모적인 구조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저는 이렇게 사후에 복잡한 과정을 사회적 공감대를 얻어서 서서히 퇴화시키고, 사자를 위해서 후손들이 담당하는 역할을 현실적으로 열악한 노인들의 복지를 위해 과감하게 투자해서 살아 있을 때 혜택을 주어, 모두가 소외 받지 않는 복지사회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복잡한 사회구조가 짧은 기간에 이루어지리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만 보편타당성을 가진 가치라면 노력해볼 필요가 있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별 내용도 아닌데 장문으로 답해서 미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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