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글 - 발전 유감

관리자
발행일 2005-12-02 조회수 7

한겨레] 오늘부터 지상파 디엠비 방송이 시작된다. 처음 태어나 ‘엄마, 아빠’란 단어를 배우는 것도 나에겐 무지 힘들었다. 한 6개월 쯤 걸린 것 같다. 그 뒤 쏟아지는 무수한 단어들을 매일 익히며 살려니 너무 힘들다. 그래도 어쩌랴. 남들과의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고 살려면 배워야 한다. 디엠비는 음성과 영상을 휴대용·차량용 수신기에 제공하는 방송서비스로 ‘손안의 티브이’라 불린다. 안 그래도 티브이에 빠져 사는 국민들인데 손 안에 티브이를 들려줬으니 ‘소’처럼 열심히 티브이에 충성하겠구만. (소가 왜 갑자기 나왔냐고? TV를 거꾸로 보면 소가 된다.)
난 티브이를 통해 먹고 살지만, 하루 24시간 방송을 보며 집 밖에서 걸어다니면서까지 티브이를 보는 건 아니라고 본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아직도 티브이에 나왔다면 다 믿어 버린다. 사람을 영웅으로 만드는 것도, 바보로 만드는 것도 티브이다. 티브이에 나온 옷을 입고, 티브이에 나온 식당에서 밥을 먹고, 티브이를 보며 화내고 울다가 잠들어 버린다. 아직도 대한민국은 1984년이다.
티브이는 시청률이 올라가야 광고가 팔리고 그래야 프로그램이 유지되기 때문에 시청자들이 좋아하는 걸 만들 수밖에 없다. 그런데 방송 관계자 중에는 “중학교 1학년 수준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다. 그렇게 만든 프로그램이 히트치는 걸 볼 때면 진짜 우리 국민 수준이 중학교 1학년인가 하는 자괴감에 빠지기도 한다. 티브이가 우리 국민을 중학교 1학년 수준으로 평준화시킨 것인지도 모르겠다.
티브이를 바보 상자라고 한다. 생각없이 보고 따라하게 만들어서 그렇다. 올드보이는 티브이를 통해 도청장치에 대해 알게 되고, 싸움을 익히고, 여자들 손의 온도가 1도 높아서 일식 요리사가 드물다는 것을 배운다. 이제 일반인들도 창문을 열어 하늘을 보는 대신에 티브이를 켜서 날씨를 알아본다. 세차를 해야 할지 어떤 주식을 사야 할지도 알려주는 ‘스마트 상자’가 되었다. 코미디언이 나와서 “담배를 끊으라”고 하면 그의 암이 담배와 상관이 있든 없든 수백만명이 담배를 끊는 ‘멘토’의 역할까지 수행한다. 물론 몇 달 뒤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시 담배를 찾았지만….
휴대폰을 잠시 꺼둬야 할 때가 있다는 광고가 생각난다. 아무리 현대생활에 필요한 휴대폰이고 티브이이지만 잠시 꺼두고 책을 읽자. 손으로 만지는 종이의 촉감과 ‘밑줄 쫙~’ 그어가며 읽을 수 있는 책의 친절함에 빠져보자.
“이보슈. 우리나라가 디지털 강국으로 거듭나는 이 마당에 발전을 계속해야지 뭔 소릴 하는 거유?”
발전이라…. 청계천 복원하고 발전했다고 난리치는 국민들에게 이런 소리하면 돌 맞겠지만, 그 청계천이 발전되기 전에는 고가도로도 없었고, 거기에 시멘트로 발라진 인공개천 대신에 맑은 물이 흐르던 물길이 있었답니다. 우리가 발전한다며 공장 지어 폐수 흘려보내고 자동차 다닌다고 고가도로 만들고 그랬답니다. 건강하게 행복하려고 웰빙이니 유기농이니 찾지만 원래 우리가 수십년 전에 먹던 농산물은 전부 웰빙이며 유기농이였다우. 농부님들 지금 가슴이 미어지시죠? 휴대드폰 팔고 자동차 팔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농산물 시장을 열었겠지만 수십년 뒤 먹거리가 무기가 되는 날이 오면 그때 가서 후회들 할 겁니다.
발전이란 게 뭔지…우리가 망가뜨리고 다시 복원하기 위해 비싼 대가를 치르는 걸 발전이라고 하는 건지… 나는 디엠비니 뭐니 하는 단어를 몰랐고 ‘엄마, 아빠’만 알던 그때가 더 행복했던 것 같은데…기저귀만 제때 갈아주고 젖만 제때 준다면 말이죠.
신상훈/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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