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지역 친일파들, 누가 있을까나?

관리자
발행일 2009-11-15 조회수 19

신문기사)목포지역 친일파들 누가 있나?
친일인명사전 등재 본격 추진해야  

*이난영 기념사업과 친일행적에 대한 자..

일제강점기 목포행정의 중심기관이었던 목포부청에는 오늘날의 시의회와 유사한 목포부회라는 의결기관이 있었다. 목포부의 조선인들의 행정참여는 어떤 방식으로 이뤄졌는가? 주요 참여인사들은 누구인지 면면을 살펴보는 것은 개항100년 목포의 역사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시금석이 될 것이다.

1897년 10월 1일 개항을 통해 근대도시로서 출발한 목포는 우리나라 식민역사에 있어서 식민무역의 중추거점으로 역할을 해온 아픈 과거를 가지고 있다.

조선정부는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변경하면서 나름대로 자주성을 담보하면서 근대화를 추진하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조선정부는 재원확보를 위해 개항장과 대외무역을 늘려 관세수입을 확보하고 직접적인 고정 수입원을 늘리고자 했으며 자본의 원시적 축적구조를 갖춤으로써 지주·상인층을 육성해 자본주의적 토대를 마련하고자 했다.

그러나 개항 이후 목포항의 무역은 저개발형 통상구조와 취약한 생산기반으로 인해 미곡수출, 서양산 면포 수입이 주로 이뤄졌고 무역에서의 주도적 역할을 일제에게 빼앗기면서 대한제국이 세계자본주의로의 종속을 가속화시키는 한 축으로 작용하게 됐다.

이러한 대한제국의 몰락 과정 속에서도 목포인근 시·군의 토호세력과 지주세력은 미면교환체제를 통해 새롭게 형성되는 자본주의 속에서 자본축적을 하게 되고 나중에 일제의 식민통치기구 속에서 나름대로 역할을 해가면서 지역사회의 중추적 핵으로 성장하게 된다. 이는 1905년 우리나라가 일제의 보호국으로 전락하면서 대한제국의 행정기관이었던 무안감리서가 폐지되면서 본격화된다.

무안감리서를 대신해 한국인에 대한 행정권과 치안권 등 일체의 치안권을 무안부의 관할로 넘어가고 일본인들은 일본이사청을 통해 독자적 자치권을 행사했으며 1910년 한일합방과 함께 일본인이 부윤이 되는 목포부와 무안군으로 행정구역이 나눠지게 된다.

이후 새롭게 바뀐 행정기구와 헌병경찰의 총칼을 통한 무단통치로 조선민중을 다스려온 일제는 3·1운동 이후 문화정치라는 새로운 방식의 조선 지배체제를 구축하게 된다. 조선인들을 식민체제에 편입시키기 위해서 일종의 유화책이 필요했을 뿐만 아니라 「이이제이」 방식을 통해 내부 갈등구조를 양산할 필요성을 느낀 것이다.

구체적 실현을 위해 최소한의 언론·집회·결사의 자유를 허용하고 조선인들 내부에서 일제의 지배체제에 협조하는 친일세력을 양성시키기 시작한다. 이에 따라 도와 부에 평의회와 협의회라는 자문기관을 설치하고 이들 기관의 의원들 사이에 조선인들을 참여시켜 형식적으로나마 조선인 대표를 지방행정에 참여시키게 된다.

그러나 선거권자는 부세(지방세)를 5원 이상 납부한자로 한정했기 때문에 사실상 민의를 대신하기보다는 일본인들과 식민통치 속에서 수혜자로 성장한 특권층의 대표기관이 될 수밖에 없었다.

총독부는 1931년 다시 행정기구를 개편해 자문기관이었던 부협의회를 부회로 바꾸고 오늘날의 의회와 같은 의결기관으로 만들고 부윤이 맡고 있던 의장직 외에도 부의장 제도를 신설하고 임기도 4년으로 연장했는데 이에 따라 당시 13명에 지나지 않던 목포부회 의원들도 13명에서 30명으로 늘렸으며 김상섭 씨 등 3명에 지나지 않던 조선인 의원 수를 10명까지 늘렸다.

목포부회의 참여했던 의원들 중에는 여류소설가 박화성 씨의 남편인 천독근 씨, 한국의 대표적인 극작가인 차범석씨의 부친 차남진 씨, 사의찬미를 부른 가수 윤심덕과 현해탄에서 몸을 던진 김우진씨의 형 김철진 씨, 독립운동가에서 인생의 진로를 바꾼 이의행, 권영례 씨, 유달산을 두번이나 팔아먹은 정병조 씨, 암태도 소작쟁의 운동 당시의 문제의 지주 문재철 씨, 가수 남진씨의 아버지이자 5대국회 민의원 김문옥 씨 등이 있었다.


△ 암태도 소작쟁의를 보도한 <동아일보>1932년 4월 6일자 기사. 지주 문재철의 이름이 또렷하다.

그렇다면 일제의 새로운 식민통치 기구인 목포부회에 참여했던 목포지역 인사들은 누가 있을까?

총무처 정부기록보존소에 보관 중인 조선사정지와 목포부 관련자료,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자료 등에 따르면 목포지역에서는 1927년부터 1940년까지 8대의 부협의회와 부회에서 활동했던 168명의 인사 중에는 113명의 일본인과 55명의 조선인이 참여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목포지역에서는 목포부회의 대표적인 인물은 무안과 완도 지역의 곡물을 취급했던 미곡상 김상섭 씨로 암태도 소작쟁의 운동의 장본인인 문재철 씨와 1925년 동아고무 공업주식회사와 목포창고 금융주식회사를 경영했으며 목포양조와 전남신탁의 사장을 거친 목포의 대표적인 조선인 자본가였다.

김상섭 씨는 김영학 씨와 함께 1910∼1920년대 초까지 임명직 부협의회 회원 7명가운데 조선인 대표로 참가했으며 이후 일제 식민통치가 끝날 때까지 지속적으로 정·재계에서 중심적 역할을 하게 된다.

후에 그는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거쳐 전라남도 평의원으로 진출하게 된다. 한국 최초의 외과의사인 차모씨의 형이자 극작가 차범석씨의 아버지인 차남진 씨는 김상섭 씨가 경영했던 회사들의 취체역과 호남은행 감사를 거쳤으며 1914년부터 해방될 때까지 중추원 참의을 역임했다. 유달산을 두 번이나 팔아먹는 등 구한말부터 부동산 투기로 이름을 날렸던 정병조 씨도 동양물산 사장과 목포제빙 취제역으로 있으면서 목포부회에 참여했다.

1919년 2월 동경에서 2·8독립선언을 경험했던 남궁혁과 함께 목포지역 3·1운동을 주도했던 서울 유학생 권영례 씨는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의 옥고를 치르고 나와 인생의 진로를 바꿔 해초 및 조면업자로 성공, 후일 부회에 참여했으며 같이 시위를 주도했던 오도근 씨도 부회에 일원이 되게 된다. 한국 최초의 여류 소설가 박화성 씨와 결혼으로 이름이 알려진 일본 유학파 천독근 씨도 일원으로 목포직물회사를 운영했으며 후일 징용과 관련해 말썽을 빗기도 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사의찬미로 유명한 가수 윤심덕과 현해탄에서 몸을 던져 유명한 소설가 김우진 씨의 형인 김철진 씨도 목포부회에 참여했는데 김씨는 목포지역 조선공산청년회 세포책임자와 신간회 간사까지 역임하는 등 좌익운동의 일선에서 활동하다가 후일 인생의 진로를 바꾸게 되는데 해방 후 전남상대 학장까지 역임하게 된다.

역시 신간회 부회장으로 목포지역 청년운동을 이끌었던 이의행 씨도 목포부회의 한 축이었으며 전국적인 농민운동의 불씨를 당겼던 암태도 소작쟁의 운동 당시 문제의 지주이자 목포 문태학원 설립자인 문재철 씨도 부회 의원이었다.


△ 문재철이 설립한 문태학원을 모태로 한 문태고등학교.
또한 최근까지 지역의 문화운동에서 주도적인 활동을 펼치다 작고한 김모씨도 목포부회를 비롯해 동양척식회사에서 근무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목포 문화예술계의 대표적인 친일전력자는 가수 이난영과 그녀의 남편 김해송이다. 이난영은 가수로서 김해송은 작곡가로서 일제에 부역했다. 김해송은 한국전쟁 당시 친일전력자로 납북되어 총살되었다고 알려지고 있다. 또한 이난영의 정부였던 가수 남인수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친일파로 두 사람은 사실상 부부이자 듀엣으로 활동하였다.

가수 이난영과 남인수가 듀엣으로 부른 ‘이천오백만의 감격’은 일제의 총알받이로 지원하라는 일종의 독려의 앨범인 ‘혈서지원’에 실려 있는데 가사는 다음과 같다.

역사 깊은 반도 산천 충성이 맺혀/ 영광의 날이 왔다 광명이 왔다/ 나라님 부르심을 함께 받들어/ 힘차게 나아가자 이천오백만/ 아 감격의 피 끓는 이천오백만/ 아 감격의 피 끓는 이천오백만

동쪽 하늘 우러러서 성수(聖壽)를 빌고/ 한 목숨 한 마음을 님께 바치고/ 미영(米英)의 묵은 원수 격멸의 마당/ 정의로 나아가자 이천오백만/ 아 감격의 피 끓는 이천오백만/ 아 감격의 피 끓는 이천오백만

이 아침/ 천황폐하의 백성인 우리/ 우리들 오늘부터 병정이 되어/ 가련다 전투의 바다 끝으로/ 아 누가 여기에 <이난영 남인수 이천오백만의 감격>


△ 1958년, 국도극장 공연을 앞두고 기념 촬영에 나선 이난영. 뒤 쪽에 남인수의 모습도 보인다.

목포시와 일부 시민단체까지 가세해 친일파 이난영을 기념하는 기념사업과 가요제까지 진행하고 있다. 이와 반대로 진주시와 시민단체, 학계, 언론계 등으로 구성된 ‘남인수가요제 심의위원회’는 지난달 ‘남인수가요제’ 폐지를 의결했다. 전국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목포시만이 친일전력자를 기념하고 가요제를 치르고 있다.

목포부 협의회와 부회에 참여했던 인사들은 대부분 목포지역의 상공인, 지주, 금융자본가였으며 유권자 수를 제한하다 보니 1935년 기준 유권자 수는 목포 5만 인구 중에서 일본인 8백33명과 조선인이 5백51명에 불과한 실정이었다.

민의를 대변했다기보다는 소수 이익집단의 대표로서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자료 부족으로 인해 이들 중에서 몇몇은 구체적 친일 행각은 드러나지 않는다. 일제가 조선민중의 저항력 약화와 친일파 양성을 목적으로 만든 것이 부회인 것은 분명하지만 부회에 참여했다는 것만으로 친일파로 규정하는 것은 무리가 따를 수도 있다.

이들에 대해서는 부회에서 나름대로 목포시민의 권익을 위해 봉사했다거나 당시 시대 상황에서 재력을 가진 사람들 중 일제와 협조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이는 친일이라기보다는 사업가로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일반론도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몇몇 사학자들을 중심으로 그들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고 당시 그들이 목포부회에서 발언했던 내용과 집행 사업이 목포대학 도서관과 정부 기록보관소에 그대로 보관돼 있는 만큼 앞으로 번역작업과 체계적인 연구과정을 통해서 속속들이 밝혀질 것으로 보인다. 이들 중 상당수는 향후 친일인명사전에 등록되어야 할 인물들이다.

그동안 우리나라 친일의 역사 파헤치기가 이완용 등 몇몇 유명 인사들에 국한되었던 것이 현실이다. 또한 최근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발간 이후 박정희와 장지연 일가의 사례를 보더라도 만만치 않은 저항도 이뤄지고 있다.

목포지역 시민사회단체와 언론에서도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목포지역 인사들이 누구인지에 대한 관심과 검증에 나서야 할 것이며 누락된 사람들에대해서도 철저한 조사가 이뤄져야 할 것이다.

이제는 해방 이후 과거 친일의 행각을 숨기고 이승만정권에 기생해 중앙권력을 강화시켜주기 위한 노력을 마다하지 않은 토호세력들의 과거행적이 파헤쳐져야 한다. 그래서 대표적인 친일행각이 의심되는 인사의 장례식이 목포시민장으로 치러지는 웃지 못 할 역사는 이제 다시는 반복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출처 : 목포지역 어느신문 홈페이지


→ 여수지역에도 친일파가 있으면 친일인명사전 조속히 등재할 필요가 있다. 여수에도 그런인물이 있으면 지역적인 자존심과 정서에 상처를 입을수 있는 중대사안인만큼 생각해볼 문제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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