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문학상 시부문 당선작

관리자
발행일 2015-05-27 조회수 10

[2015 5.18문학상 시부문 당선작] 김성일
 
검은 물 밑에서
    
그 할머니는 각서를 썼다고 했다
죽어도 괜찮다고 각서를 썼다고 했다
가족들도 괜찮다고 각서를 썼다고 했다
그래야 아파트 청소부로 취직할 수 있었다고 했다
  
뜨겁던 하늘에서 돌연, 비가 많이 내린 날에
언덕에는 폭포가 생기고
검은 강이 아스팔트를 덮었다
강남 땅에 유난히도 많이 다니던 자동차들은
흙탕물 속에 둥둥
연못의 개구리 마냥 떠다녔다
  
높은 아파트에서 살던 사람들은 피난을 가고
아파트에는 이제 경비 보는 사람들이랑 청소하는 사람들이랑
그 사람들을 감시하는 사람들이랑
그렇게만 남았다고 한다
  
어느 날 그 할머니는
시커멓게 물에 잠긴 지하를 청소하러 내려갔다고 한다
물은 그득하고 사람도 없는데
왜 그랬는지는 모른다고 한다
몰라서 모르는 건지 알아서 모르는 건지도 모른다고 한다
어쨌든 모른다고 한다
검은 물 밑을 청소하던 할머니는
그대로 검은 물 밑에 가라앉았다고 한다
  
땅 위에는 자동차가 둥둥
땅 밑에는 빗자루가 둥둥
그렇게 검은 물이 세상을 나누고 있었다고 한다
  
물이 걷히고 햇볕이 오르고
그제서야 자기 집으로 돌아온 사람들은
검은 물 밑에 무언가가 있다는 걸 알았다고 한다
무언가가 무어인지는
  
몰라서 모르는 건지 알아서 모르는 건지 몰라도
어쨌든 몰랐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것들을 검은 물 밑에 그냥 두자고 했다고 한다
그리고 어느 날 다른 청소부를 불러다가
물도, 물 속의 모든 것도 쓸어내다 버렸다고 한다
  
그 뒤에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어쨌든 아무도 모른다고 한다
  

<시 심사평>
  
아쉽게도 작년에 비해 응모자의 수가 큰 폭으로 줄었다. 성급한 진단을 자제해야 하겠으나 아무래도 세월호 사건의 충격과 비통이 한 원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라 짐작된다. 그 충격과 비통은 펜을 들어 무언가를 말해야 한다는 절박감을 높이지만, 동시에, 그 어떤 문장도 쉽게 쓸 수 없게 하는 무력감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지난 1년 동안 얼마나 많은 분들이 ‘말해야 한다, 그러나, 말할 수 없다’라는 진퇴양난의 상황 속에서 고투했을까 우리는 짐작해 보았다. 이런 와중에도 몇몇 분들의 작품이 우리의 눈길을 끌었다.
  
대상에 선정되지 못했으나 심사위원들의 호감을 이끌어낸 분들의 이름을 적는다. <형> 외 5편을 보내준 한교만씨는 구면이었다. 지난해 응모작들 중에서 <살아있는 별>이라는 작품이 높은 평가를 받았었거니와 이 작품과 함께 새로운 작품 몇 편을 함께 보내주었다. 역시나 단단한 완성도를 자랑하는 시들이었다. 그러나 ‘시를 쓰기 위한 시’ 혹은 ‘잘 만들어진 시’라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는 점에 대해서 스스로 고민을 해 볼 때가 아닌가 한다. <가면> 외 9편을 보내준 김대성씨나 <파우스트> 외 8편을 보내준 이경자씨의 작품도 인상적이었다. 이미지에 의한 ‘우회’와 솔직한 진술에 힘입는 ‘직진’을 유려하게 병행할 줄 안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시를 쓸 줄 아는 분들이다. 그러나 관념이 생경하게 노출되는 장면들이 더러 있어 이를 좀 더 세련되게 통제하면 어땠을까 싶다. <안 한다고는 못한다> 외 8편을 보내준 이수안씨와 <길을 묻다> 외 4편을 보내준 성용구씨의 이름도 적어두고 싶다. 다른 응모자들에 비해 아직은 손길이 거칠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이분들은 진심을 힘 있게 전달할 줄 안다. 기교의 수련이 더 뒷받침되어야 하겠지만 그것이 저 힘 있는 진심을 훼손하지는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대상은 <도토리의 계보>외 4편을 보내준 김성일씨에게 주어졌다. 김성일씨를 당선자로 뽑는 데에는 일찌감치 합의가 이루어졌으나, 다섯 편의 시 중에서 어떤 작품을 당선작으로 내세워야 할지를 두고 고심했다. 그만큼 각 시편이 소재 면에서는 다채롭고 완성도 면에서는 대등했다. 역사 속에서 고통 받은 이들, 사회적 죽음에 내몰린 이들에 주목하면서 그와 같은 비극의 이면에 어떤 ‘구조적 원인’이 있는지를 하나의 서사 혹은 우화로 축조해내는 능력이 출중했다. 당선작이 된 <검은 물 밑에서>는 우리시대의 계급격차와 비인간성을 ‘폭우로 인해 검은 물이 들어 차 있는 지하실에서의 비극적 죽음’이라는 강렬한 설정으로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검은 물속에 잠겨 있는 시체가 끝내 외면되고 폐기되는 결말은, 어쩌면 시인의 의도를 초과해서, 세월호의 비극을 환기하는 측면도 있다. 고통스러워도 눈 부릅뜨고 읽어야 할 이 작품을 올해의 당선작으로 천거하는 데 우리는 숙연한 마음으로 합의했다.
  
이시영, 나희덕, 신형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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