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의 문화 가능한가?

관리자
발행일 2003-02-24 조회수 5

강준만교수의 강연을 듣고
언론개혁의 선두에 있는 강준만님이 여수 은현교회에서 강연을 했다.
시각에 따라 차이는 있겠으나 나의 관점에서 본다면 박정희의 군사문화 속에서 삶의 가치기준이 상업주의와 배타주의로 기울게되었고, 그러한 형태의 문화가 이제 다시 우리를 괴롭히고 있다는 논지이었고, 이런 문화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기보다는 이를 이용하여 적당히 자기들의 이율배반적인 점만을 고려하여 국민을 기만한 과점 언론들 때문에 국가는 보다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벗어날 줄을 모르고있다고 하였다.
그 해결책의 하나로 수구기득권 세력의 변화보다는 지방언론의 활성화가 무엇보다 중요하고  문화가 주는 아픔의 피해자인 민초들이 주류가 되어, 변화의 실천을 주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조정래가 쓴 대하소설 아리랑이 무산계급, 즉 프롤레타리아 혁명세력의 시각에서 쓰여졌다면, 박경리의 토지는 유산계급, 즉 부르주아들의 시각에서 쓰여진 작품이다.
군주시대에 지배계급과 피 지배계급의 갈등이 개화기와 일제강점기 동안에 좌익과 우익으로 갈리기 시작하였고 해방과 함께 좌와 우는 극심하게 대립하였고, 국가의 방향을 국민스스로 선택하려는 과도기적 시점에서 강대국이 개입했고, 우리 민족의 의지와는 달리 북은 좌익이 남은 우익이 소련과 미국이 요구하는 체제로 강점되면서 국토를 반절로 나누어 이데올로기적 식민지로 전락하는, 수치스러운 한 민족 두 국가가 탄생하고 말았다.
북쪽의 우익인사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조정래는 태백산맥에서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미국의 앞잡이 노릇을 한 우익들이 민족공동체라는 인식은 안중에도 없이 좌익들을 마구잡이로 죽이고, 동족간에 상처를 입는 소용돌이 속에서 좌익들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야 말았다고 하였다. 그들은 모두 우리의 형제였으며, 자매였다.
친일파를 처단하지 못하고 미국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이승만은 갖가지 부정부패로 국가를 유지하려다가 박정희를 포함한 군인들에게 쿠데타의 빌미를 제공하였고, 박정희는 여기서 승리하여 민주주의라는 허울아래 세계적으로 유래가 없는 정치, 경제, 사회문화를 모두 혼자서 좌우하는 한국적 군사독재를 20년간 유지하다가 끝내는 총살을 당하였다.
박정희는 그의 장기집권을 반대하는 민주세력을 억압하고 그것도 모자라 좌익이라는 올가미를 사용하여 죄 없는 많은 사람들을 죽이면서 정권을 유지하는 수난의 역사가 계속되었다.
박정희는 전후 피폐해진 경제와 국민들의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하여, 국민의 합의 과정도 없이 일본과 화해하고, 월남전에 파병하여 젊은이들의 목숨과 건강을 담보로  사회간접자본을 확보하여 국가건설을 시작하였다. 새마을운동이라는 슬로건 하에 모든 국민의 눈과 귀, 손과 발을 묶어서 산업사회로의 전환을 시도하였다. 이 시기에 기업들은 정부의 협조로  현실적으로 배고픔을 참기 어려운 약점을 이용하여 노동자들의 인권과 노임을 착취하였고, 기업인들이 부를 축적하는 동안 많은 노동자들이 직업병과 산업재해로 죽어 가는, 돈이면 사람의 생명도 경시하는 사회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자영업자와 소기업들이 전환기를 맞이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사카린을 밀수하면서까지 외연을 확대한 삼성이라는 재벌과 막대한 수출장려금을 챙긴 현대는 인력수출과 해외공사수주를 한 건설과 자동차사업에서 큰돈을 벌어 재벌로 급 부상하였다.
노동자들이 의식화되면서 사용자와 정부를 상대로 노동자들이 법적. 사회적으로 보장되어 있는 권리를 찾기 위하여 투쟁하고 절규하였으나 이때마다 정부는 그들을 적당히 좌익이나 빨갱이, 불순분자로 몰아붙여 사회적으로 매장을 시키거나 죽이는 일을 밥먹듯이 하였다.
위정자들이 누리는 풍요와 부의 축적만을 최고의 가치로 하는 기업가들을 동경할 수밖에 없는 국민들 대다수가 관료사회나 상업에 진출하게 되고, 정치, 경제, 사회는 물론 인간의 가치를 창출해야 하는 교육마저도 상업주의에 물들어 사제간의 관계가 허물어지고, 나라 전체가 물질만능의 사회로 전환하고 말았다.
박정희에게 돈을 받아서 정치를 한 야당의 국회의원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참으로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후손들이 겪을 아픔을 생각하며 반성하고 있지는 않겠지!
인간이 가져야 할 보편 타당한 기치기준이 무너지고 오직 소유만이 삶의 목적인 사회가 된 이 슬픈 현실이 세계적으로 한강의 기적이라는 업적으로 자리 매김 하였다.
비록 균형적인 분배를 하지 못하고, 빈익빈부익부라는 절름발이식 경제부흥을 이루었음에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화폐로 계산할 수 없는 정신세계나 삶의 가치 그리고 도덕과 윤리의 부재에서 오는 사회적 질서의 파괴로 인하여 고통 당해야 하는 비용을 공제한다면 과연 얼마나 남겠는가?
국민 모두가 부정과 부패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를 획득하여 남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만 지구와 문명의 혜택을 소비하면서 누리려고 하는 사회적 병폐 때문에 지불해야하는 비용은 후손들의 부채로 남아 있다.
이와 같은 문화가 알게 모르게 우리에게 복수 내지는 부담으로 다가오고, 그 부담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 우리의 아픔이라고 생각해봅니다. 더더욱 거기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과거 역사 세대들이 그들의 잘못을 인정하려고 들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이 역사의 수레바퀴를 우리가 끌어가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단 잘못 끌어온 수레이지만 주자를 바꿀 때는 큰 마찰 없이 미소를 주고받을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종국에 이웃이고 어른이며 함께 살아야 함이 필연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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