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역사는 바로 잡읍시다.(여수시민이)

관리자
발행일 2003-12-27 조회수 13


삼국통일(三國統一)은 왜곡된 매국행위(賣國行爲)
1340년전의 신라의 삼국통일은 삼국통일이 아닌 한마디로 한민족의 시조(始祖)인 단군(檀君)왕검(王儉)이 이룩한 선대 고조선을 짓밟아 버렸고 자신들의 목적함을 이루기 위해서는 인륜(人倫)도 도덕(道德)도 양심(良心)도 저버리는 민족성(民族性)이 곳곳에서 나타나니 다음과 같다.
라당연합군(羅唐聯合軍)이라는 이 명칭 자체가 가져다주는 속(內)이다.
라당연합군(羅唐聯合軍)을 만들기 위해서는 박철언이가 과거에 대북밀사의 특명(特命)으로. 또는 이후락이가 휴전선을 넘어 가서 김일성과 만나서 서로 의견을 나누고 우리가 이리 할 테니 너희는 저리하라는 조약(條約)이 있어야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의 명칭이 성립된다.(이부분에 대한 고문서(古文書)를 현재 추적중임)
그리하여 당시 그들은 군사의 수도 많고 병기도 백제(百濟)보다 훌륭했지만 자력으로는 백제의 용맹성(勇猛性)과 지략(智略)지모(智謀)에 당해내지를 못하니 미련한 머리로 생각해낸 것이 외세(外勢)의 힘을 빌려서 자신들의 야욕(野慾)을 채우는 것이었다.
그것이 라당연합군(羅唐聯合軍)인데 이들(唐)은 나중에 꿩먹고 알먹는 위치에 가고 우리나라 단군신화(檀君神話)는 치욕적인 군사관계를 가지게 되며 나라는 종속(從屬)관계로 전락하니 요즘에 중국일부 교수들이 주장하는 우리나라와 중국관계는 자기 자신들의 변방(邊防)이라고 우기는 것이 억지가 아닌 그 라당연합군(羅唐聯合軍)에 근거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래서 결국에는 그 훌륭한 고구려의 대륙(大陸)을 모두 다 내어주고 백두산(白頭山)까지 빼앗기다 시피한 지금의 역사가 신라가 주장하고 그 후손(後孫)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삼국통일(三國統一)이라는 단어다.(平和統一이 아닌 武力統一이요 그것도 자력(自力)이 아닌 外勢에게 거래로서 저지른 賣國行爲)
그때 당시에 그들은 그것도 부족하여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 내지는 조상에 대한 명분을 축적시키기 위해 백제(百濟) 의자왕(義慈王)을 타락한 왕(王)으로 만들기 위한 구실이 삼천궁녀(三千宮女) 낙화암(落花岩) 사건(事件)이다. 곧 역사를 왜곡 조작 시켰던 것이다.(3,000여명의 궁녀가 자야할 방도 없었지만 당시의 사비성 규모는 겨우 둘레가 1.5km에 불과함)
이들이 백제(百濟)에게 맨 날 얻어터지고 깨진 것이 의자왕(義慈王) 시절에만 대야성(합천)등 40여성(城)을 빼앗긴 터에 이제나 저제나 얼마나 이를 갈았겠는가.
그래도 이들은 승복하지를 않고 궁리 해낸 것이 조상님들이 말씀하시기를 떼놈이요! 흉노족(匈奴族)이요! 오랑캐라 일컬은 천하(天下)에 근본(根本)이 다른 민족(民族)과 결탁하여 나라를 팔아버리는 짓을 저질렀으니 이들에게 겁탈(劫奪) 당하고 도륙(屠戮)을 당하느니(이민족(唐)은 본시 자신들의 역사에도 전쟁 중에 여인네를 보면은 겁탈하고 도륙을 하는 민족임)자신의 한 몸 더럽히지 않으려는 정절(貞節)의 낙화암(落花岩)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그 피해가 역사적으로 얼마만큼 크냐면 당시에 이들에게 희생된 수십만의 억울한 죽음과 왜곡되게 편찬되어온 승자들이라고 함부로 써온 역사, 그리고 신라가 넘겨준 광활(廣闊)한 大陸과 고구려 한민족의 압록강(鴨綠江)이북으로의 분단, 건국(建國)의 신화가 중국과 분명히 다른데도 이후에 펼쳐지는 歷史的 從屬關係, 등이다.
신라(新羅)의 모습을 보자면, 신라군들이 나름대로 당시에 교육시켜온 화랑도들을 보면 전부 어린 학도병으로서 무엇을 반증 하냐면 그 민족성을 엿볼 수 있다.승리를 위해서라면 누구든지 어린아이도 싸워야 한다는 단순한 전쟁논리다.
거기에는 어떤 명분도 가치도 전략도 정의로움도 없다.
왜냐면, 황산벌에서의 백제와 신라의 마지막 전투에서 백제계백은 신라 장수 품일의 아들 화랑관창을 체포 하였으나 그 어린것에 용기가 가상하여 전쟁의 이용할 가치가 있는 전략적 제물(祭物)인데도 놓아주었다. 그럼에도 신라민족은 백제 계백장군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또다시 관창을 내보내서 결국 관창이 목베이게 한다.
그러나 황산벌 전투는 백제오천(5,000)군사와 신라의 라당연합군(羅唐聯合軍)오만(50,000)군사의 많은 수에 무너지고 마니 그 신라후손들이 지금도 써먹고 있는 그 뿌리 한나라당과 같은 다수의 횡포다.
우리는 여기서 예의 주시할 것은 라당연합군(羅唐聯合軍)의 많은 수로 상대를 죽여서 자신들의 목적함을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눈앞에 보이는 승리를 취하려는 신라민족의 비겁한 근성과, 당장은 패배 했지만 16세의 관창을 살려 보내는 덕장(德將)의 용기를 보여줌으로서 후대에 교훈 삼게 하는 승리(勝利)인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원숭이들에게 비유되는 조삼모사(朝三暮四)도 이런 얄팍한 민족성(民族性)을 지닌 민족들에게도 적용된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후로도 우리 백제후손들의 우수한 민족성은 곳곳에서 나타나니 임진왜란(壬辰倭亂)때 전라좌수영민(여수시민)들이 경상우수영에서의 전투를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웠을 때 도망만 다니는 경상우수영 군졸들을 보고(그래서 동래성이든지 경상도 쪽 성은 모두 함락됨)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느끼고 깨닫기를 지역감정의 단초가 되어 벼슬길이 막힐 수도 있었으나(그래서 결국 달구지 옥사로 끌려가지만)“약무호남시무국가”(若無湖南是無國家)하였으니 곧“만약에 호남이 없었다면 나라가 없었으리라”고 백제후손(百濟後孫)의 우수성을 또 한번 입증 시킨다.
그것뿐이 아닌 것은 화순의 의병장 최경회(崔慶會)는 왜군이 침략하여 진주성(晋州城)이 함락직전이라는 전갈을 받고  500여 의병을 소집 출진의 명을 내리니 의병의 일부가 호남을 두고 머나먼 진주까지 군사를 이끌고 싸우러 가는 것이 옳지 못하다 하니 “호남도 우리 땅 영남도 우리 땅인데 어찌 멀고 가까움을 가리겠는가.”하여 진주성으로 달려가 크게 승리하고 두 번째 전투에서 전사하니 어려서 자신을 보살펴준 은인이요 나중에는 정인으로서 후실이 되는 주논개가 이 소식을 접하고 전라북도 장수에서 내려와 촉석루(矗石樓) 의암(義巖)의 역사를 진행시킨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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