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베트, 악마에서 천사로[박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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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05-01-18 조회수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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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사섹션 : 박노자의우리가몰랐던동아시아 등록 2004.07.01(목) 제516호



[박노자칼럼] 티베트, 악마에서 천사로
[박노자의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
서구인들이 ‘진리의 낙토’로 찬양하는 땅… 왜 그들의 감화를 마냥 기뻐할 수 없는가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 · 한국학

몇년 전 필자는 한 미국인 학자와 함께 한국 사찰들을 순례한 적이 있었다. 한국이든 중국·일본·베트남이든 후한 점수를 주려 하지 않았던 그 학자의 비판적인 동아시아관에 예외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티베트였다. 한국 불교 지도층의 문제점을 예리하게 분석했던 그 학자에게 티베트 불교의 지도부는 ‘성인’(聖人)으로 보이고, 한국 선맥(禪脈)에서의 사자전승(師子傳承·사찰에서 스승과 제자 스님으로 이어지는 법) 계보들에 대해 의심함에도, 달라이 라마가 관음보살의 화신이라는 티베트 불교의 주류 세력인 겔룩파(Gelukpa·格魯派)의 주장은 그대로 긍정했다.

유럽에게 티베트는 왜 예외인가

그 학자의 티베트관을 접했을 때 처음에는 티베트의 종교·독립 운동에 대한 개인적인 호감으로 생각했지만, 유럽에서 살게 된 뒤 학술적 차원이든 대중문화의 차원이든 ‘티베트’라는 존재가 많은 유럽인들에게 기타 비서구 지역들과 정반대로 의식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학술적인 차원에서 서방에서의 이슬람 문화권 연구의 묵시적인 전제는 “우리와 달리 근대화에 실패했다”는 테제이고, 한국학 연구에서는 성리학적 보수성, 공(公)적 공간의 불충분함, 노비제 등이 조명되는 등 비서구에 대한 비하론적 서술의 전통은 그대로 계승된다.
그런데 티베트에 대한 상당수 구미 학자들의 서술은 아예 접근부터가 다르다. 예컨대 미국 불교학계의 원로이고 시사주간지 <타임>이 “미국의 가장 영향력 있는 25명” 중 한명으로 지정한 로버트 투먼(Robert Thurman) 컬럼비아대 교수는, 그의 최근의 베스트셀러 <내면의 혁명: 생명, 자유, 진정한 행복의 추구>(1999)에서 티베트를 “불교적 통치 아래서 물질에 대한 영(靈)의 승리로서의 진정한 근대성인 내면적인 근대성을 이룬 지구를 구제할 미래형 문명”이라고 부른다.
달라이 라마의 “학술적 대변인” 격인 투먼의 경우야 특별하다고 치더라도, 스칸디나비아의 많은 학자들도 중국이나 네팔 등과 전쟁도 치르고 권부(權府) 내부의 폭력적 파벌 투쟁의 경험도 많은 티베트를 “폭력이 존재하지 않는 윤리적 사회”로 여기고 있다. 비서구 지역에 대해 비판적이다 못해 경멸적이기까지 한 서구 학자들도 이처럼 ‘녹아버리는’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되는가? 대중문화에서 ‘티베트’ 담론은 “진리의 낙토(樂土) 티베트”에 대한 찬양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티베트에서의 7년>이라는 영화를 기억하는가? 이기적이며 냉정한 오스트리아의 산악인 하인리히 하러(실제로 하러는 소신파 파시스트였는데 영화에서는 제대로 언급되지 않는다)가 어린 달라이 라마의 교사이자 친구가 돼서 애타주의와 내면의 평화를 배우고, ‘세계의 영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에게 서구의 문명과 영어를 가르쳐준다. 영화 속의 티베트는 정신적 발전의 별천지로, 1950년 티베트를 침략하여 점령한 중국군은 “마지막 낙원”을 망가뜨리는 악마로 묘사된다. 고급 라마들의 안정된 생활을 받쳐주는 것이 바로 티베트 인구 절반을 차지하던 사찰의 예속 농민이었다는 사실, 농민들이 중세 유럽의 농노처럼 주인에게 가혹한 체형을 당할 수 있었다는 사실, 사찰들이 이자놀이를 벌이는 고리대금업자의 노릇도 겸했다는 기초적인 상식도 반영되지 않았다. 침략 초기에 중국 당국이 달라이 라마 정권을 포섭하여 중앙 정부의 대리인으로 삼으려 한 역사적 사실도 무시당했다. 영화뿐만 아니라 도서 시장에서 범람하는 각종 ‘자기계발’ ‘정신 발전’ ‘요가와 명상’ 같은 책에서 ‘티베트 라마’는 진리를 깨달은 ‘영적 지도자’로 나타나 숭배? ?받는다. 도대체 티베트 라마들은 어떤 이유로 이와 같은 파격적인 대접을 받고 있는가?

17~19세기 선교사들은 사악하게 묘사

현재의 현상들을 피상적으로 본다면 오리엔탈리즘에 젖은 유럽인들이 티베트를 일종의 예외로 대우해주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대학 강단에서 티베트의 ‘내면적 근대성’이 서구의 ‘외면적 근대성’보다 우월하다는 소리가 들릴 정도라면 그게 오리엔탈리즘의 대척점이 아닐까? 그런데 유럽인들의 티베트관의 역사를 심층적으로 들여다보면 티베트를 우러러보는 그 태도의 내면에 오리엔탈리즘적 요소들과 정책적인 계산들이 내재돼 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유럽인으로서 최초로 티베트를 정탐한 17~19세기 가톨릭 선교사들은 사찰의 지옥도(地獄圖)나 공포스러운 모습의 호법신(護法神)들의 그림에 경악해 티베트 불교를 중국 불교보다 더 사악하게 묘사했다. ‘라마교’(Lamaism)라는 비칭이 붙은 티베트 불교에 대해서 19세기 말 영국 탐험가들은 “신도들의 복종만을 요구하는 정신적 테러리즘”이라고 혹평했으며, 1904년 영국군의 티베트 침략에 종군해 나중에 <라사의 베일 벗기기>란 베스트셀러를 낸 에드문드 챈들러(Edmund Chandler)는 티베트 승려들을 “미신을 수단으로 혹세무민하여 민중에 악정을 베푸는 무리”로 봤다. 그 “미신”이 “지구를 구할 진리”로 탈바꿈한 것은 1920~60년에 이루어졌다.
세계 공황·대전들의 시대에 서구적 근대성에 회의를 느낀 서방 지식인들에게는 폭력의 도가니에서 구해줄 ‘이질적이며 신비스러운 존재’가 필요했는데, 신지파(神智派·theosophy)라는 소수의 신비주의자들에 의해 ‘세계의 영적 중심’으로 해석된 바 있던 티베트야말로 ‘안성맞춤’이었다. 이슬람권과 달리 유럽과 경쟁한 역사도 유럽의 식민 지배를 받은 적도 없는 그야말로 ‘경계선 밖의 오지’, ‘우리’에게 저항한 적이 없는 ‘그들’을 영적 스승으로 받아들이기에 별 거리낌이 없었다. 근대성에 회퓔?느낀 지식인들이 신좌파 등 ‘불온 사상’에 빠지기는 걸 방지하려 했던 미국 등지의 주류 보수주의자 입장에서도, 1959년부터 망명하여 대중국 독립 투쟁에 나선 관계로 미 정부의 지원에 의존해야 하는 달라이 라마가 서구 지성계의 ‘스승’이 된다는 것은 걱정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보수적 기독교의 기반이 잠식당하는 것은 안타까웠지만, 같은 ‘동양 스승’인 마오쩌둥이나 호치민보다 낫지 않았겠는가? 또한 무엇보다 티베트는 인도와 중국 사이의 전략적 요충지이다. 이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망명 중인 티베트 정통 지배자들과 서방 지성! 계 사이의 두터운 연결고리가 필요한 것이다. 그리하여 ‘공포스러운 미신’은 거의 100만명에 이르는 미국인의 신앙·애호의 대상이 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면 그 효과로 티베트에 대한 서방인의 태도는 오리엔탈리즘의 테두리를 벗어날 수 있을까? 벗어나는 게 아니라, 비하 위주의 ‘부정적인 오리엔탈리즘’ 대신 낭만적 소비로서 ‘긍정적 오리엔탈리즘’이 서구가 티베트를 보는 프리즘이 된 듯하다. 티베트에 대한 상상은 ‘정체되고 신비스러운 오리엔트’의 패러다임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다. 대상물의 복합성을 무시해버리는 타자에 대한 일차원적 의식의 형태가 원래 그렇듯이 그에는 폭력적인 이면들이 많다. 티베트가 획일적으로 ‘불교의 낙토’로 상상되는 만큼 티베트 토착 종교인 본교 신도들이 몰이해를 당하게 되고, 달라이 라마가 ‘티베트의 대표자’로서 위치를 점하는 만큼 달라이 라마의 종교적 지도를 받지 않는 가규파(Kagyupa·?擧派) 등 소수 문중들이 소외당한다. 특정 대상물의 숭배적 신비화는 결국 타자에 대한 이해와 포용이라는 불교적 가치에 대한 배반으로 이어질 수 있다.

티베트 안에서 소외당하는 사람들

물론 일부 서구인들의 티베트 불교에 대한 감화를 기뻐할 수 있고, 중국과의 협상에서 세계 여론의 카드를 십분 이용해야 할 달라이 라마가 미국 정계와의 어쩔 수 없는 유착도 이해할 일이다. 그럼에도, 티베트 민중을 사랑하는 입장에서 티베트가 단지 구미인의 ‘상상적 이용’의 대상물이자 미 정부의 대중국 정책의 수단이 된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티베트도 여느 다른 지역 못지않게 모순으로 찬 계급사회이며 불평등한 위계질서적 관계나 종교집단, 집권 파벌 사이의 갈등 등의 문제를 안고 있다. 티베트 불교를 존중한다면 티베트 불교의 신비로움을 즐기며 달라이 라마를 숭배하기보다는, 차라리 티베트 불교에서 남녀·승속이 더 평등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그리고 자본주의와 제국주의로 죽어가는 셀 수 없이 많은 약자들과 희생자들이 불교의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참고문헌]
1. Donald Lopez, Jr., S.,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8. 유럽인의 ‘티베트적 상상’의 허망함을 거의 최초로 깨쳐준 한 불교 학자의 저서. 요점 정리: http://www.press.uchicago.edu/Misc/Chicago/493105.html
2. Peter Bishop,, London, 1993. 신지파부터 오늘까지의 ‘티베트숭배’의 역사를 칼 융의 정신분석학적 방법으로 파헤친 책.
3. Martin A.Mills,, Routledge, 2003. 라다크 지역의 한 티베트 사찰을 구체적 사례로 승속 사이에서의 역학 관계와 티베트 종교에서 토착적 요소들의 역할을 분석한 책.
4. Michael Parenti, Friendly Feudalism: The Tibet Myth,
http://www.michaelparenti.org/Tibet.html 마르크스주의적 입장에서 티베트 사회 정치사를 분석하여 ‘비폭력적 윤리적 사회’의 신화를 공격하는 논쟁적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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